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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명진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국립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도서문화 도서문화 제32집
발행연도
2008.12
수록면
273 - 327 (5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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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궁예정권 아래에서 왕건은 903년에 처음으로 금성군(나주)을 공략하였다. 이후 왕건은 909년에 甄萱이 오월국으로 들여보내는 배를 사로잡고, 진도군과 고이도를 공략하였다. 甄萱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910년에 금성군를 에워싸고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911년에 궁예정권은 새로운 서남해의 중심으로 선택한 금성군을 나주로 개명한다. 왕건이 애초에 공략하고자 했던 목표는 무주였다.
둘째, 나주에서 왕건에게 가장 우호적인 세력은 장화왕후 오씨 집안이었다. 그녀에 대한 側微라는 표현은 상대적 측미라고 정리하였다. 왕건의 첫째부인인 유씨에 비해 상대적으로 측미했던 것이다. 이때의 목포는 현재의 영산포 일대이며, 오씨와 부부의 인연을 맺은 것은 911년이었다. 그리고 왕건은 나주를 공략하면서 그 공으로 인하여 점차 신분이 상승하고 있었다.
셋째, 왕건은 甄萱과 싸운 덕진포전투를 승리로 장식하고, 서남해의 마지막 걸림돌인 압해도 능창을 제압하였다. 이 두 사건이 발생한 연도는 912년이었다. 능창은 독자세력이었으며 매우 센 존재였다 능창을 제압한 이후에도 왕건의 신분은 계속 상승하였다. 평민 출신인 왕건의 승차를 통해서 신라 골품제 사회가 와해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넷째, 왕건이 즉위한 후에도 나주는 계속해서 중시되고 있었다. 시중을 지낸 구진을 나주의 책임자로 보내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930년 고창군전투이후의 어느 시점부터 935년 4월 이전까지 甄萱에게 나주를 빼앗겼다. 백제의 내분을 틈타 왕건은 935년 4월에 다시 나주를 되찾는다. 두 달 후에 왕건의 평생의 적인 甄萱이 나주로 귀부해 온다. 이때 甄萱은 나주를 작은 배 한척으로 왔을 것이다. 왕건은 40여척의 배를 보내 甄萱을 개경으로 정중히 모셔온다. 이처럼 나주는 왕건에게 있어서 보배와 같은 존재였다. 이후 통일을 완수할 때까지 나주는 튼튼한 高麗의 땅이 되었다.

목차

논문개요
Ⅰ. 머리말
Ⅱ. 弓裔政權下에서 나주 공략과 莊和王后 吳氏와의 혼인
Ⅲ. 압해도 능창 제압
Ⅵ. 太祖王建 執權期 나주 공략
Ⅴ. 맺음말
참고문헌

참고문헌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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