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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선혜 (가톨릭대학교)
저널정보
가톨릭대학교(성심교정) 인간학연구소 인간연구 인간연구 제12호
발행연도
2007.1
수록면
93 - 123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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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 한민족이 교류하는 주변의 민족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다. ‘중국인과 그 나머지 야만인’이다. ‘그 나머지 야만인’은 거란ㆍ몽고ㆍ여진 등으로 일컬어진 북방 민족과, 왜로 지칭된 남방의 종족이었다. 야만인으로 인식되던 여진인이나 왜인 가운데 조선으로 향화(向化)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발생했다. 또한 조선에 표류하여 온 네덜란드인도 있다.
이러한 향화인은 야만인이었지만, 이제 조선 국왕의 교화(敎化) 안으로 들어오게 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향화인을 바라보는 시각이 문화적 개념, 곧 문화적인 우월성을 바탕으로 한 개념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시각에 바탕을 둔 것이었으므로 향화의 동기는 기본적으로 조선 국왕의 ‘의’(義) 내지는 ‘인정’(仁政) 등을 사모하여 온 것으로 표현되었다.
동기가 무엇이든 향화인은 이제 국왕이 교화로 이끌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러므로 문화적으로 이질적이고 열등한 소수자인 그들을 조선의 백성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이들에 대한 정책의 최종 목표였다. 그들을 정복하거나 적당히 활용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결국 왕의 교화를 입어 조선의 백성처럼 살게 하는 데 있었다.
향화인에 대한 구체적인 정책은 여러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그들의 동족을 회유하거나 정벌에 참여하게 하고, 때로는 간첩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변방 방어에 동원하기도 하고 국내에서 시위(侍衛)를 서게 활용하는 정책 등이 추진되었다. 이를 뒷받침해 주기 위해 일반적으로 향화인에게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고 여러 가지 경제적인 배려도 베풀었다. 결혼을 시켜 주기도 하고 맡은 일에 따라 녹봉, 과전, 가사 등을 지급했다.
향화인에 대한 교화 정책을 보면 다른 종족에 대한 인종주의적인 편견은 찾아보기 어렵다. 향화인과 조선인과의 혼인 정책을 추진하면서도 이른바 ‘혼혈’에 대한 편견이나 우려는 드러나지 않는다. 조선인과 향화인을 가르는 기준은 문화적 차이였으며, 이 점에서 보면 향화인은 조선인으로 흡수되는 문이 열려 있던 셈이다.
그러나 남쪽의 왜와 북쪽의 여진에 의한 두 번의 전쟁을 겪은 뒤에는 이민족에 대한 인식이 크게 변했다. 그 이전까지 중국 이외의 민족은 문화적 열등자이며 교화의 대상일 뿐이었다. 간혹 그들로 인해 성가시기는 했지만 그것이 왕조를 뒤흔들 위협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이민족에 대한 문화적 우월감의 바탕에는 그들에 대한 적개심과 거부감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므로 여진이나 왜는 물론 서양에서 오는 사람에 대한 관대한 포용·교화 정책도 변하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은 향화인이 조선인으로 흡수ㆍ포용되는 길이 사라졌음을 의미한다. 이제 향화인은 국가적ㆍ혈연적으로 구분되는 이질적이고 불편한 사람들이었다. 문화적인 차이와 달리, 국가의 다름과 혈연적 구분을 용해시킬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거기에 더해 문화적 차이조차도 그 바탕에는 적개심과 거부감이 자리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에 국가와 인종, 그리고 문화의 차이가 나는 소수자들이 포용ㆍ흡수되기 어렵게 되었다.

목차

1. 머리말
2. 향화인(向化人)의 개념
3. 여진ㆍ왜로부터의 향화인에 대한 정책
4. 남만인(南蠻人)의 경우
5. 맺음말
국문초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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