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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한문종 (전북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28집
발행연도
2007.12
수록면
89 - 116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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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조선시대 한일관계에서 특이한 존재인 向化倭人이 나타나게 된 배경과 유형 및 정치?사회?경제적 대우, 그리고 향화왜인과 이예와의 관련성을 살펴본 것이다.
먼저 조선초기 향화왜인의 발생배경은 조선의 왜구대책과 토지나 식량의 부족으로 인한 생활고 때문이었다. 특히 조선초기의 향화왜인은 투항한 왜구가 많았다. 이는 조선의 왜구대책에 따라 왜구가 평화적인 통교자로 변질되어 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 후 향화왜인은 대마도주의 사신, 표류인을 송환한 자, 倭僧, 三浦 恒居倭人 등으로 확대되었다.
조선전기 향화왜인은 항왜, 구류왜인과 포로, 스스로 향화하거나 도망쳐 온 자, 송환된 피로인을 따라 온 자, 왜승, 대마도주의 사송왜인, 삼포항거왜인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초기 향화왜인 중에는 왜구로 투항하여 조선의 관직을 제수받은 자들이 많았다. 그 중 일부는 대마도로 돌아가서 후에 통교자로서 도항하였다. 이는 이후 일본에 거주하는 왜인에게 관직을 제수하는 배경이 되었다.
향화왜인에 대한 조선의 사회?경제적 조치는 관직의 제수 유무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즉 조선에서는 관직을 제수받지 못한 향화왜인을 각 지방에 분치하여 식량과 토지, 의복, 집 등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조선에 정착할 수 있도록 일정기간 동안 田租, 賦役, 軍役을 면제해주었다. 반면에 관직을 제수받은 향화왜인에게는 관직에 상응하는 祿俸과 衣服, 집, 노비 등을 지급하였다. 또한 이들 중의 일부에게는 姓名과 貫鄕을 하사하였다.
한편, 『성종실록』 6년 6월 신사조에 李從實에 대해 그를 향화왜인 이예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예가 향화왜인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는 유일한 기록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이예가 활동하던 시기의 기록과 그의 졸기 등에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 점을 고려하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오히려 조선초기 한일관계에서 이예의 역할이 매우 컸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사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향화왜인의 발생배경과 유형
3. 향화왜인의 처우
4. 향화왜인과 이예와의 관계
5. 맺음말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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