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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고창석 (제주문화예술재단)
저널정보
한국인물사연구회 한국인물사연구 한국인물사연구 제12호
발행연도
2009.9
수록면
259 - 288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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濟州島는 조선왕조 약 500년을 통하여 200여 명에 달하는 流配人들이 귀양살이했던 곳이다. 그들의 신분도 위로는 光海君을 비롯하여 왕족, 정치인, 학자로부터 僧侶와 宦官, 도적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이었다. 유배의 형벌은 기한이 정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종신형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정세 변화에 따라 석방된 뒤 다시 벼슬길이 열려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독약을 내려 자결하게 하거나 다른 지역으로 유배지를 옮기기도 하였다. 또 석방된 뒤에 제주도에 정착하여 入島祖가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주도에 유배된 특수한 사례로는 아버지와 아들이 앞뒤하여 유배되거나 재차 유배되기도 하였으며, 또 전 가족이 유배되는 경우도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이 유배된 경우로는 현종 15년(1674)에 大靜縣 延來村에 유배된 申命圭와 경종 2년(1722)에 대정현 柑山里에 유배된 申?을 들 수 있다. 이 때 신임의 나이는 84세의 고령이었으며 영조 원년(1725)에 석방되어 돌아가던 도중 海南에서 사망(87세)하였다. 또 숙종 15년(1689)에 유배된 金鎭龜와 숙종 32년(1706)에 유배된 金春澤도 아버지와 아들 관계이다. 이들 父子의 적거지는 공교롭게도 濟州城內 東泉洞의 州妓 吳眞의 집이었다.
이들은 제주도에 유배된 뒤, 그들이 거처하는 곳에 제주 사람의 子弟나 儒生들을 불러 모아 학문과 지식을 전달하여 학문 향상이나 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유배된 신분이면서도 제주 사람들에게 서울의 학풍을 전수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들과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맺고 교분을 두터이 한 대표적인 제주인물로는 전라도 萬頃 縣令을 지낸 吳廷賓을 들 수 있다.

목차

【국문요약】
Ⅰ. 머리말
Ⅱ. 申命圭ㆍ申? 父子의 流配와 吳廷賓
Ⅲ. 金鎭龜ㆍ金春澤 父子의 流配와 吳廷賓
Ⅳ. 吳廷賓의 文科及第와 仕宦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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