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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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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한국기독교와 역사 한국기독교와 역사 제23호
발행연도
2005.9
수록면
73 - 95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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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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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문은 1905년에 내한해서 1936년 신사참배문제로 미국으로 출국해야 했던 평안도 지역의 대표적 선교사였던 맥큔(George S. McCune, 尹山溫) 선교사를 다루었다. 윤산온은 파크대학의 설립자의 딸과 결혼했고 그 자신이 파크대학 출신이자 교수로 일을 했다. 그는 한국에 교육선교사로 와서 파크대학의 자조부처럼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제도를 평안도 지역의 교육기관에 접목시켰다. 처음에는 선천의 신성학교에 후에는 평양의 숭실학교와 숭실전문학교에 이것을 소개했다. 이러한 일과 학업의 병행은 당시의 평안도의 지역적 특성, 즉 자주적이고 위계질서가 강하지 않은 중산층문화에 하나의 촉매작용을 해서 후일 이 지역에서 사업가들이 많이 나오게 하는데 일조했다.
그의 신학적 입장은 보수적이었지만 그가 1912년에 있었던 데라우치 암살미수사건 혹은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서 일본인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데서 보듯이 그는 한국인들의 민족주의적 열정에 일정한 공감을 가졌다. 물론 그것이 그가 늘 반일적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의 활동에서 보듯이 근본적으로 교회의 확장과 기독교 교육에 그의 삶은 집중되었지만 30년대 중반 점점 더 강화되어가는 일제의 전체주의 체제에서 그의 의지와 상관없이 종교의 자유 때문에 식민지 당국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른바 1935년 말에서 1938년까지 진행된 신사참배문제였다. 윤산온은 그 사건의 한 가운데 있었는데 당시 미국영사관과 일본 지역의 선교사들은 평양 지역의 북장로교의 이러한 입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추방은 바로 미국과 일본 당국의 갈등의 시작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목차

1. 머리말
2. 윤산온(GSM) 선교사의 생애와 초기 활동
3. 3ㆍ1운동 전후와 2차 내한 후의 활동
4. 1930년대 신사참배문제와 귀국 후의 활동
5. 맺음말
참고자료
국문초록
Abstractr

참고문헌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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