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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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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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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50
발행연도
2008.6
수록면
295 - 325 (3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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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의 연구에서는 김주원이 ① 원성왕에게 받은 거대한 식읍이 명주에 있었으며, ② 명주로 오기 이전에 이미 혈연적 연고를 두었고, ③ 명주로 퇴거할 때 추종세력이 함께 이주했다는 것을 근거로 범일과 김주원계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먼저 주장하는 바는 김주원계를 매우 큰 세력으로 상정하고 이들과 범일이 신라말 명주라는 시간과 공간의 동일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개연적으로 논의한 것이었다.
김주원이 받았다는 식읍이 기록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인물조는 조선전기 명족의식에 의해 족보가 만들어지던 시기에 작성된 것으로 각 지방의 거족들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다. 강릉 읍사의 주축을 이루고 있던 거족인 강릉김씨는 자신들의 시조인 김주원을 현창하고자 임금에 버금가게 명주군왕으로 칭하고 많은 지역의 식읍을 받았다고 인물조에 기재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역사적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즉 통일신라 때 봉호의 방식으로 식읍이 주어졌으나 김주원에게는 봉토로 지급되었고, 나라를 들어 항복해 온 견훤과 경순왕의 식읍이 1군에 지나지 않은데 비해 반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던 김주원의 식읍은 5군에 걸쳐 있었다. 또 사망한 정의태후가 교지를 내렸다고 등재하였고, 신라시대 관등으로 잘 알려진 상대등을 상대장등으로 잘못서술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 때에 없는 지명인 근을어를 기록하였다.
②와 ③의 주장은 사료적 가치가 적은 족보와 최근에 만든 비문에 근거하였다. 여기에는 김주원의 부친인 김유정이 강릉에 벼슬하러 갔다가 그곳에서 박씨를 만나 결혼하였다고 실려 있다. 그러나 골품제사회에서 신라 최고위층인 경주 진골과 지방 토착세력 간의 결혼이 이루어졌는지 의심스럽다. 김주원의 휘하세력으로 경주에서 명주로 퇴거할 때 함께 했다고 거론한 최ㆍ함ㆍ박씨는 모두 고려 건국 이후에 명주에서 활동한 성이다. 또 열거한 성씨는 『세종실록』 지리지와 『승람』의 기록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이 내용을 족보와 비문에 옮겨 적은 것으로 보인다.
결국 강릉김씨가 강릉에 제대로 정착한 것은 김주원대가 아니라 『강릉김씨세보』에 삼한공신이라 나오는 김식희대에 이르러서였다. 이와 같이 범일이 살았던 시기인 신라 하대에 그가 주로 활동하였던 명주지역에서 김주원계는 큰 세력을 형성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범일과 김주원계의 관계는 미약할 수밖에 없다. 이 취약한 관계는 범일의 가족과 김주원계와의 관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범일의 조부로 명주도독을 지냈던 김술원은 신라말에 반란 등 정치적 목적에 의해 김주원계가 명주에 관리로 파견되지 않은 점으로 보아 이 계통의 사람이 아니다. 김주원과 김술원이 ‘원’자를 돌림으로 썼고 동시대에 살았다고 하나, 족보에 기록된 것처럼 신라말 김주원계는 항렬자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이들이 살았던 시기도 한 세대 이상 차이가 난다. 또 범일의 어머니인 문씨는 累葉豪門이었으므로 명주에 거주한지 얼마 안되는 김주원계와는 다른 집안이다.

목차

국문초록
Ⅰ. 서론
Ⅱ. 『新增東國輿地勝覽』의 김주원계 관련 기사의 비판적 검토
Ⅲ. 족보와 비문의 김주원계 관련 기사의 비판적 검토
Ⅳ.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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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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