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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전경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역사문화학회 지방사와 지방문화 지방사와 지방문화 제15권 제1호
발행연도
2012.5
수록면
217 - 264 (48page)
DOI
10.17068/lhc.2012.05.15.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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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본고에서 전라도 부안의 우반동에 世居했던 扶安金氏家에서 노비들이 어떠한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먼저 이 부안김씨의 中興祖로 알려진 김홍원은 농장을 관리하던 사내종 우세와 집안일을 도맡아서 한 군석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 중 군석은 이 가문의 戶奴였는데 그는 집안의 모든 일을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상전을 대신하여 관에 탄원서를 제출하고 세금도 납부하는 등 執事奴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상전도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주려고 노력하였다.
김홍원과 그의 조상들은 전라도 용담현과 임실현의 섬진강과 금강 상류 근처에서 물을 막아 논을 개간하고 부안현의 주을래리의 바다에 漁場을 조성하였는데 이러한 일들은 모두 협동심이 강하고 숙련이 잘 된 사내종들이 있어야만 가능하였다. 부안김씨가 경제적으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사내종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또 김홍원은 1597년에 일본군이 조선을 再侵하자 그의 家奴 중 용맹하고 충성심이 강한 사내종들을 데리고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사내종들은 비록 군사 훈련을 받지는 않았지만 개간 등을 통하여 체계적으로 조직되고 잘 훈련되어 있었는데 전쟁터에 나가서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선봉에 서서 싸웠기 때문에 곳곳에서 커다란 戰功을 세울 수 있었다. 김홍원은 그들의 승리 덕택에 하루아침에 정3품 通政大夫가 되고 그 이후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다. 물론 김홍원이 이와 같이 여러 관직을 역임하게 된 것은 그의 능력과 노력 등이 바탕이 되었지만, 의병 활동으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부안김씨는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는 노비 덕택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경제적 또는 정치적으로 부상할 수 있었지만, 그들 때문에 고통을 겪기도 했다. 많은 노비를 소유했던 부안김씨가 戊申亂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또 이 집안 노비 출신이 반란군을 지휘한다는 소문 때문에 김홍원의 후손들은 사형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우반동의 부안김씨는 자신 소유의 노비들을 잘 관리하였다. 손재주 좋은 노비들에게 각종 생필품 등을 제작하도록 하고 어업에 종사하는 외거노비들에게는 신공 대신 물고기를 바치도록 해서 家內에서 사용하거나 혹은 京鄕의 친인척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또 부안김씨는 부안과 그 인근 고을에 있던 경화사족의 농장에서 생산된 곡식이나 생필품 등을 자신들이 소유하고 있던 선박을 통해 서울과 경기 등지로 운송해주는 등 갖은 편의를 제공하며 경화사족과 교류하였는데 바로 이 집안에 사공노릇을 하는 사내종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결론적으로 부안김씨가 해안가의 궁벽한 마을에 세거하고 있으면서도 양반으로서의 가세와 지체 및 명성을 유지하고 살 수 있었던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이와 같은 노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목차

[초록]
1. 서론
2. 조선 후기 우반동 부안김씨가 소유 노비 현황
3. 상전가의 일을 도맡아서 한 사내종
4. 상전가에 경제적, 정치적 도움을 준 사내종
5. 경향의 여러 사족들과의 교류를 도운 노비들
6. 결론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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