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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42
발행연도
2006.6
수록면
231 - 271 (4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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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라 중대부터 등장하기 시작하는 新金氏에 관하여 살펴본 것이다. 특히 신김씨를 사용한 집단은 누구인지, 그리고 그들이 신김씨를 사용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를 밝히는데 초점을 두었다. 그 동안 신김씨는 대체로 김유신 가문과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해왔다. 그래서 우선 신김씨가 김유신 가문과 관련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삼국사기』에는 7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김유신의 묘비와 9세기 전반 김유신의 興武大王 追封에 따라 건립되었으리라고 여겨지는 「金庾信碑」의 편린이 전한다. 이를 검토해 본 결과 김유신 가문은 신라 중ㆍ하대에 걸쳐 김씨만을 사용하였던 것으로 이해되어 신김씨는 김유신 가문과 연결시키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신김씨를 사용한 집단을 알아보기 위해 신김씨의 용례가 살펴지는 「眞鏡大師塔碑」에 주목하였다. 그것에 의하면 주인공 審希의 선조는 任那王族이며 遠祖는 김유신이라고 한다. 그런데 김유신 가문에서는 신김씨를 사용한 적이 없었고 遠祖라는 용어 또한 ‘먼 조상’이라는 막연한 의미로 사용되었으므로, 심희를 김유신의 직계손으로 보기는 어렵다고 보았다. 심희의 활동을 고려해보면 그는 왕경보다는 김해에 연고를 둔 인물이었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금관가야의 멸망 이후 계속 김해에 거주하고 있었던 금관가야왕족의 후손들(김해거주금관가야왕족의 후손들)이 신김씨를 사용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김해거주금관가야왕족의 후손 가운데는 통일기 왕경으로 인구가 유입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왕경으로 이주한 자들도 있었다. 왕경으로 이주한 김해거주금관가야왕족의 후손들은 자신들과 혈연적으로 무관하지 않은 김유신 가문이 김씨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도 김씨를 사용할 수 있도록 문무왕에게 賜姓을 요청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김씨 진골귀족들과 신분적으로 차이가 있었고 더구나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문무왕은 그들의 요청을 그대로 수용하기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당시는 수로왕과 그 후손들을 우대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문무왕은 김씨 대신 다른 성씨를 하사하는 선에서 그들의 요청을 들어주려 하였다고 여겨진다. 문무왕 20년(680) 김해에 小京을 설치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으로 파악되는데, 김해에 소경을 설치함으로써 왕경으로 이주한 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여전히 김해에 거주하고 있던 김해거주금관가야왕족의 후손들도 성씨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한 조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문무왕은 종래 왕경에 거주하던 김씨 진골귀족들과 구분되는, 지방에서 올라온 새로운 김씨라는 의미를 지닌 신김씨를 김해거주금관가야왕족의 후손들에게 하사하였던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렇게 해서 문무왕 20년(680)을 즈음해 신김씨가 등장하였던 것으로 이해해 보았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金庾信 家門과 新金氏
Ⅲ. 金海居住金官加耶王族의 後孫들과 新金氏
Ⅳ. 金海居住金官加耶王族 後孫들의 新金氏 取得過程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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