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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학회 사학연구 史學硏究 第88號
발행연도
2007.12
수록면
311 - 360 (5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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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구는 권상일의 일기인 『청대일기』를 통하여 그의 초입사인 承文院 權知副正字와 蔚山府使 생활을 검토한 것이다. 그는 많은 관직을 제수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 역임했던 것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그 기간도 짧았다.
권상일은 1710년(숙종 36) 6월에 급제하여 謝恩肅拜를 거친 후 10월 말에 승문원에 分館되었다. 당시 영남인으로서 유일하게 들어갔다는 자부심도 있었지만 免新禮에 대한 염려 때문에 上京이 늦어졌다. 1711년 4월에 한양에 도착한 후, 그는 『槐院古例』에 의하여 면신례를 거쳤다. 승문원의 면신례는 혹독했으며 밤에 鬼服차림으로 선배들의 집을 돌면서 자신의 명함을 돌리는 回刺와 許參의 과정이 있었다. 권상일은 그 과정에서 많은 굴욕을 참아야만 했다.
권상일 재직 시에 제작된 『槐院契帖座目』을 통하여 당시 승문원의 인원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이들이 나아갔던 다음 관직도 찾아낼 수 있었다. 권지부정자의 업무는 크게 回公과 製述로 나눌 수 있다. 회공은 외교문서를 가지고 여러 관료들 집에 들러서 회람시키는 일이었고 제술은 외교문서를 짓는 일이었다. 특히 회공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말을 타고 여러 관료들을 찾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병약했던 권상일은 상당히 곤혹스러워 했으며 결국 下鄕하기에 이르렀다. 승문원은 규율이 엄격했던 관청이었던 만큼 受由, 褒貶, 分館 등에 대한 규정도 까다로웠다.
울산부사는 지역적인 특성상 군사적인 역할이 강조되었던 직책이었지만 남인으로서 퇴계의 학통을 이어받아 학문에 더 큰 뜻을 두었던 권상일은 교육의 문제에 더 큰 관심을 보였다. 鷗江書院의 東西齋를 건립했고, 儒生들을 모아 놓고 직접 講을 하기도 했다. 또 최초의 울산읍지인 『鶴城誌』 편찬에도 힘을 기울였다. 백성들의 생활과 직접 관련이 있는 賦稅행정 면에서는 원칙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울산부 영역 밖의 업무로는 差倭에 대한 일이 많았다. 당시 왜에서는 수시로 표류민을 인솔한 漂差와 특정 사안을 해결하기 위한 裁判倭 등을 파견했다. 이 문제로 인해 권상일은 접위관으로 뽑히거나 행사에 참여하고, 그 접대 비용을 마련하는 등의 업무를 수행했다. 또 兼官제도로 인해, 권상일은 당시 언양겸관과 경주겸관을 동시에 맡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업무의 과중함을 겪었다. 결국 그는 포폄에서 3번 中점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러나 그는 관직보다는 학문에 대한 열정이 컸으므로 오히려 이 사실을 반기고 있었던 면모를 보여주었다.
문과급제자로 출사하기 시작한 권상일의 관직생활은 南人이라는 배경, 학문과 교육을 추구하려는 개인적인 성향으로 인해 그의 관직 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또 당시의 정치상황도 그로 하여금 학문과 교육에 치중하도록 한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런 성향으로 경관직과 외관직에서 모두 학문과 관련된 사안들은 매우 적극성을 띠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실제로 업무를 수행했던 관직자에 대한 사례연구로서 이 분야에 일조를 기대하는 바이다.

목차

요약
머리말
Ⅰ. 權相一의 官歷
Ⅱ. 初入仕로서의 承文院權知副正字 생활
Ⅲ. 蔚山府使 시절의 外官생활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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