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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학회 사학연구 史學硏究 第84號
발행연도
2006.12
수록면
35 - 108 (7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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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에서는 국내외적으로 여러 어려움에 처해있던 高麗 顯宗 7年(1016)~12年(1021)에 완공된 奉先弘慶寺의 王室願堂과 院으로서의 機能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를 통해 顯宗이 廣緣通化院이 부속된 法相宗 사찰인 奉先弘慶寺를 창건함으로써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으며, 先考?의 명복을 비는 동시에 효율적인 지방통제의 수단으로 삼고자 하였다는 것을 고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顯宗은 太祖의 8男인 安宗 郁과 景宗의 4妃인 獻貞王后 皇甫氏가 私通하여 태어났다. 그후 그는 穆宗 말년의 金致陽 亂과 康兆의 政變을 거쳐 어렵사리 왕위에 즉위하였고, 즉위한 元年에는 契丹의 2차 침입까지 당하였다. 세력기반이 미약했던 顯宗은 西京勢力을 비롯한 국초이래의 大豪族勢力과 契丹의 侵入으로 부심하였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여 이러한 난국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忠ㆍ孝ㆍ仁 등을 강조한 儒敎理念과 法相宗을 정치적으로 적절히 이용하였던 것이다.
奉先弘慶寺 창건에는 이러한 背景 외에 顯宗 자신의 개인적 염원도 담겨있었으니, 바로 불우하게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고 國家安泰를 위해 창건한 王室願堂인 것이다. 더욱이 住持의 僧階을 통해 寺院의 격을 파악해 볼 때 奉先弘慶寺는 三重大師급이었으니 당시 顯宗이 奉先弘慶寺를 얼마나 중시하여 창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후 弘慶院에서 仁宗광 康宗 때 같은 道場이 행해진 것과 康宗의 願堂이었다는 것, 그리고 고려말에 韓修가 弘慶寺에서 축성드린 것을 볼 때 奉先弘慶寺는 高麗 王室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받은 王室願堂이었다. 이러한 奉先弘慶寺에는 姜民瞻ㆍ金猛 등의 別監과 都監ㆍ副都監ㆍ寺主ㆍ副寺主 등의 管理組織이 있었다. 그리고 그 규모가 顯宗대 대표적 王室願堂인 玄化寺의 10분의 1이었음을 생각해 볼 때 玄化寺의 10분의 1이라도 왕실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奉先弘慶寺가 창건된 稷山은 忠淸州道에 있으면서 아래로 全公州道와 昇羅州道를 이어주고 있어 중요한 交通의 要地에 위치하였고 顯宗代에는 軍隊가 주둔하기도 한 군사전략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高麗時代에는 교통ㆍ군사적 요지에 院을 설치하여 驛의 기능을 돕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廣緣通化院이 설치된 奉先弘慶寺는 숙박기능을 담당하여 商人ㆍ僧侶ㆍ官人 등에게 무료로 각종 편의시설을 제공하였으며, 廣緣通化院의 운영은 奉先弘慶寺에서 副寺主와 副都監을 두어 관리하였다.
顯宗代 사원의 경제력과 奉先弘慶寺가 지방민의 자발적 보시와 지원으로 창건되었으며 더욱이 군사력까지 갖추었다고 생각해 볼 때, 奉先弘慶寺는 稷山의 社會ㆍ經濟ㆍ軍事的 中心地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고 보여진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王室願堂으로서의 機能
Ⅲ. 院으로서의 機能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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