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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李炳熙 (한국교원대학교)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34號
발행연도
2010.12
수록면
111 - 145 (35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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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는 조선전기 억불정책 하에서 불교계가 겪는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사찰의 예이다. 원각사는 세조 10년 5월 국왕이 주도해 창건하였다. 조성을 위한 기구에는 왕실의 종친과 判書가 다수 참여 하였다. 그 조성에는 2,100명의 군인을 동원하였고 50명의 匠人을 사역시켰으며, 자발적으로 참여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승려의 참여는 차단되었다. 이러한 역부동원 방식은 고려시기 주로 민인을 사역시킨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전각의 이름은 여럿 확인할 수 있지만, 규모에서 볼 때 원각사는 고려시기 개경 내 소재한 대사찰에는 크게 미치지 못하였다. 고려시기의 사찰에 보이는 眞殿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조선후기에 흔히 보이는 산신각ㆍ칠성각 등도 조영되지 않았다. 원각사는 성종 19년 화재를 입자 중수가 이루어졌다. 이때 신료들의 반대가 극심하였는데, 이는 세조대에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원각사에는 토지 300결이 지급되었으며, 修掃奴(照刺赤)30명이 사여되었다. 醬과 黃豆 등 각종 물품이 지급되었지만, 속인들의 재물 시주는 활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원각사를 찾은 명과 일본의 사신이 시주하는 일도 있었다. 국왕이 행사를 베풀었을 경우 물품의 사여가 뒤따랐다. 寶를 설치해 운영하거나 상업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재원을 확보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원각사에는 지키는 正兵이 배치되어 있었다. 원각사는 세조와 예종의 병이 있을 때 기도하는 곳이었고, 국왕의 사후에 齋를 지내는 곳이었으며, 세조와 예종이 행차한 곳이기도 하였다. 기우재와 祈晴齋를 설행하는 중요 사찰이었다.
성종대부터 원각사를 둘러싸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정병의 혁파, 御室의 철폐, 노비의 혁파 등의 주장이 이어졌다. 성종 11년 木佛回立 사건을 계기로 뜨거운 논란이 있었다. 성종대까지는 신료의 반대가 있었지만 국왕은 자신이 好佛하지 않는다고 강변하면서 대체로 원각사를 유지시켜 갔다. 그렇지 만사찰로서의 기능은 상당히 축소되었다. 연산군 10년에 원각사에서 승려를 내쫓고 다음해에 掌樂院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사찰로서의 기능은 중단되었다. 명종대 문정왕후가 불교의 재흥을 위해 노력하면서 원각사를 복립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었지만, 민가가 가득 들어차 있기에 불가능하였다. 원각사의 철폐는 조선의 수도 내에서 불교적 경관이 사라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목차

요약
Ⅰ. 서언
Ⅱ. 조영 방법과 가람 구성
Ⅲ. 경제 기반과 기능
Ⅳ. 불사 관련 논란과 혁파
Ⅴ. 결어
【부록】 원각사 관련 연표
【Abstract】

참고문헌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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