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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목동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88호
발행연도
2024.3
수록면
79 - 112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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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 東宮은 지속적인 발굴 성과와 함께 연구자들의 관심을 받아오고 있다. 신라 동궁의 성격과 관련하여, 현재 동궁과 月池宮과의 관계에 대하여 논란이 지속되고 있는바, 이에 본 연구에서는 동궁과 월지궁과의 관계에 있어 중요한 주제인 副君 秀宗과 太子와의 관계, 太子妃 貞嬌의 혼인 문제 등을 살펴보았다. 부군의 성격은 憲德王이 자칭하였던 副王과 동일한 것으로, 차기 왕위계승권자인 태자를 의미하는 것이며, 정교는 헌덕왕의 次妃로서 맞이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는 모두 김헌창의 亂과 관련되었다고 하겠다. 수종을 부군으로 삼은 것이 그 난이 신속히 진압되는 이유 중의 하나로 귀결되었고, 그 난에 대한 사후 대응책으로 忠恭의 딸 정교부인을 헌덕왕의 차비로 맞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수종을 부군으로 삼았던 이유는 수종이 上大等을 역임하였고, 부왕의 사례를 遵用하였던 것이다. 부왕은 헌덕왕이, 그 자신이 왕위계승권자의 지위로 있었음을 공식화시키기 위하여 새로이 만들었던 지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태자의 거소 공간을 포함한 더 넓은 의미인 ‘國王의 동쪽 宮闕’로 변화된 동궁인 월지궁에 부군 수종이 入宮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헌덕왕이 정교를 차비로 맞이한 것은 哀莊王대부터 興德王대까지 정치를 주도하였으며 유력 權力者들의 丈人이었던 충공의 子女였다는 점이다. 이는 王權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던 대책이었으며, 김헌창의 亂에 功이 있는 충공에 대한 論功行賞의 의미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부군 수종의 월지궁 입궁, 정교의 혼인 문제 등을 이유로 인하여 동궁과 월지궁이 서로 다르다는 견해는 타당하지 않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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