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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수미 (전남대학교)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82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57 - 8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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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국외 자료에서 7세기 백제의 마지막 태자는 융이라고 하였다. 우리 측 『삼국사기』에서는 융을 태자가 아닌 왕자로 기재하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태종무열왕 7년의 백제 멸망과정 기사는 중국 측 기록에는 없는 신라의 전승 자료를 원전으로 하였다. 신라본기에서는 의자왕의 태자가 융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신라본기에서 융은 백제 왕자, 의자의 아들로 서술되어 의자왕의 수많은 아들 중 한 명이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의 융 관련 기록들은 충돌하고 있다. 이 기록의 충돌은 나당연합군에게 좌평, 상좌평, 왕의 서자를 파견했던 백제 왕자가 중대한 국정을 결정하고 수행하는 것이 그 하나이다. 둘째, 사비성에서의 융의 항복과 신라 태자 법민이 융에게 침을 뱉고 모욕한 사건, 셋째 의자왕과 태자 효가 웅진성을 나와 항복한 이후의 승전식에서 의자왕과 아들 융을 마루 아래에 앉혀놓고 술을 따르는 치욕을 준 사건 등 일련의 기록들이 서로 충돌하고 있다. 신라 측 자료에서 융의 지위는 백제 왕자와 태자 사이를 오가고 있다. 무열왕 7년 7월 13일의 기사는 신라군을 이끈 주역으로 문무왕 법민의 전기류와 같은 기록에서 발췌한 것은 아닐까 한다. 신라 태자 법민이 주인공으로 사비성 함락에 참여하고, 백제 태자 융을 사로잡으며, 웅진성의 의자왕을 사로잡아 그의 복수를 완수한다. 이 기사는 법민과 대척점에 선 세력으로 백제 융을 대비하였다. 융은 왕자 중 한 명으로, 무기력하게 항복하는 모습으로, 그리고 적국의 태자에게 수모를 당하고, 다시 승전식에서 치욕을 당하는 무능한 인물로 자리매김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자 융에게 한 말은 그가 태자 효의 아들일 경우에는 성립하지 않는다. 당군이 철수하고 의자왕과 태자 효가 돌아왔을 때 자신들의 안전을 걱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가 왕자 융의 아들이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660년 당시 융을 왕자라고 기록하였지만, 태자의 아들 문사의 말에서 융이 태자임을 짐작할 수 있다.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의 문사 기사는 『구당서』 소정방전이 원전으로 파악되었다. 『구당서』 소정방전에서는 태자 융의 아들 문사가 한 ‘우리 부자’라 하며 안위를 걱정하였다. 즉 ‘우리 부자’라는 말을 통해 이 말은 문사와 융이 사비성에서 나눈 말임을 알 수 있다. 백제본기와 『구당서』 소정방전의 문장 차이는 백제본기 내용이 『구당서』뿐 아니라 태자 효의 저본으로 추정되는 신라 측 자료의 영향 역시 받았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백제본기의 왕자 융은 신라 측 자료의 영향을 빼면 내용 상 태자 융이 된다. 백제본기의 의자왕 20년 문사 기록은 융과 문사의 부자 관계를 감추려는 묘사로 짐작된다. 백제본기에서는 융의 태자 지위를 지우고, 동시에 주체적인 문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그의 유약함을 강조하고 있다. 신라 측 기록에서는 당시 태자였던 융을 태자가 아니라 단지 의자의 아들, 왕자, 혹은 왕자 융으로 기록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와 백제본기의 왕자 융은 신라 측에 의한 수동적이고 무능한 백제 왕자 융 만들기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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