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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신운용 (사단법인 안중근평화연구원)
저널정보
숭실사학회 숭실사학 숭실사학 제48호
발행연도
2022.6
수록면
47 - 69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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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에 대응하여 의병투쟁·계몽운동을 전개한 이상룡은 1910년 일제의 대한제국 병탄이후 본거지를 서간도로 옮겨 1911년 경학사, 1913년 부민단, 1919년 서로군정서 등 서간도 독립투쟁을 주도하였다. 특히 그는 1921년 북경군사통일회에서 활동하였으며, 1925년 국무령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었다. 이후 통의부·정의부 등 서간도 자치기관을 지도하고 후원하면서도 학문에진력하였다. 특히 그의 독립투쟁 추동력이 ‘민족주의’였다는 점에서 그는 한국 근대의 대표적인 단군론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이상룡의 위상과 반비례하여, 그의 유족은 오히려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아들 이준형은 1942년 자살을 하였고, 손자 이병화는 1952년 왕성하게 활동할 나이(46세)에 사망하였다. 그의 증손자 이항증은 행방불명과 사망한 형들을 대신하여 임청각 회복을 위해 분투하는삶을 살았다. 그의 희생이 없었다면 오늘날 임청각의 모습과 『석주유고』의 발간은 불가능하였을것이다. 그의 삶은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과의 투쟁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산에 대해 욕망을 드러낸 사람들과 역대 한국정부의 독립투쟁가 후손들에 대한 미진한 정책등으로 이상룡 가문의 비극은 여전히 치유되지 못한 상황이다. 물론 이는 근본적으로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임청각을 비롯하여 이상룡이 남긴 유산을 회복하는 일은 역사정의를 실천하는 길이며, 한국 근현대사의 모순을 극복하는 길이며, 시대의 의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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