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정병준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중국사학회 중국사연구 중국사연구 제139호
발행연도
2022.8
수록면
1 - 35 (35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평회서비’에 의하면 회서 토벌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장수는 6인이다. 즉 ① 선무절도사ㆍ도통 한홍, ② 당수등절도사 이소, ③ 충무절도사 이광안, ④ 하양절도사 오중윤, ⑤ 수주단련사 이문통, ⑥ 악악관찰사 이도고 등이다. 이 관점은 문헌 사료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즉 이소에 관해서는 애초 나머지 5인과 같은 반열에 둘 수 있는지에 대한 견해 차이가 있었다고 해도, 이문통과 이도고는 문헌 기록에서는 이 정도의 평가를 받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도 상당한 공을 세운 것이 보이는 만큼 이들을 눈여겨보면서 토벌전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비문의 사료적 내용은 이처럼 한유 개인의 견해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평회서비’는 세 가지 성격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모든 공적을 황제에게 돌린다는 것이다. 둘째는 헌종에게 토벌의 결단을 내리게 하고 또 토벌전을 직접 총괄한 배도가 가장 큰 공을 세웠다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소의 공적도 높게 평가하지만, 배도의 지휘를 받은 장수의 역할로 한정하고 있다. 셋째는 번진에 대한 한유 자신의 입장을 강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한유는 번진 개혁에 대한 강경론자가 분명하지만, 나아가 다른 할거 번진에 대한 개혁까지 기대하고 있다. 비문의 가장 중요한 함의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된다. 해당 시기에 조정에서는 줄곧 강경파와 온건파가 존재하였고 또한 배도와 이봉길 진영이 서로 대립하였지만, 한유는 ‘평회서비’에서 특정한 입장을 강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평회서비’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배도의 공적 문제를 축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하나는 배도의 공을 높게 평가한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배도의 공을 지나치게 높게 평가하고 이소의 공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후자에 따라 결국 헌종이 ‘평회서비’를 폐기한 것이지만, 그 직접적 계기가 된 것은 이소의 불평과 그 처의 하소연인지, 아니면 이소의 부하였던 석효충의 행동 때문인지, 혹은 배도와 대립하던 이봉길 등의 공작에 의한 것인지를 명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렵다. 어쩌면 그러한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헌종이 여러 통로를 통해 이소 등의 불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비문의 폐기를 결정하였을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문헌 기록으로 본다면 이소의 처가 헌종에게 불만을 알렸다는 것이 가장 널리 알려진 설로 이해된다. 즉 해당 설은 정사인 구당서 한유전과 신당서 오원제전 이외에도 책부원구 권553과 태평어람 권589에도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說石烈士」는 아무래도 당 후기의 소설류에 보이는 무용담이나 극적인 이야기가 많으므로 허구일 가능성이 크다. 헌종이 ‘평회서비’를 폐기한 것은 회서보다 더 강한 평로 번진 등에 대한 개혁을 염두에 두고 국가의 역량을 통합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새로운 토벌전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소를 비롯한 장수들을 위무할 필요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평회서비’는 조정의 여러 견해 가운데 특정한 입장을 강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이에 신당서 권214, 오원제전에 보이는 대로 “황제가 또한 武臣을 거스르기 어려워 조서를 내려 그 비문을 깎아내게 한”(p.6011) 것으로 생각된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