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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정한 (계명대학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제107호
발행연도
2022.9
수록면
37 - 75 (39page)
DOI
10.37331/JKAH.2022.9.1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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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연구는 6세기 후반기에 신라 황룡사의 가람 변천과 그 창건 과정에 대해 살펴본 것이다.
황룡사는 거대한 규모와 독특한 삼금당 구조, 장륙존상 안치, 황룡사구층목탑 건립에 의해 신라의 대표적인 국가사찰로 인식되었다. 그런데 창건가람은 17년의 공사 기간에 비해 북편에 승방이 있고 중앙에 금당이 자리한 미약한 형태였다. 삼금당 구조와 강당, 회랑 등의 시설은 진평왕 6년(584)에 갖추어졌다. 이를 보면 창건 당시 황룡사는 아직 국가사찰과 같은 위상이 부여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5세기 후반 이래 월성을 중심으로 왕경에 대한 개발을 지속적으로 진행하였다. 이와 함께 왕권 강화 정책, 불교 수용, 영토 확장도 이루어졌다. 진흥왕은 영토 확장으로 늘어난 인구와 물자가 수도로 집중되는 상황을 해결하는 한편, 강력한 왕권에 걸맞는 도시를 조성하기 위해 중국의 도성제를 모범으로 삼아 왕경 일신을 단행했다.
첫 단계로 월성 동편의 저습지를 이루었던 현 황룡사지 일대에 궁궐 조영 공사를 시행했다. 그런데 저습지였던 환경은 궁궐 공사에도 어려움을 가져와 공사가 장기화되었다. 당시 신라는 대외 세력에 대한 방어와 새로 획득한 영토 운영 및 내부 갈등도 통제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왕경 일신 작업을 진행하면 국가 운영에 큰 부담이 될 수 있었고, 궁궐만 조영한다면 궁궐이 왕경의 동편에 치우쳐 왕권 장엄과 국가 운영에 적합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진흥왕은 공사 막바지에 궁궐을 사찰로 변경하였다. 이는 저습한 환경을 상징하는 용의 출현이 궁궐이 아닌 사찰 창건의 계기였던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진흥왕은 황룡에 불교용과 전통신앙의 성격을 더하여 사찰 창건의 계기로 삼아 황룡사를 창건했다.
황룡사는 갑자기 궁궐에서 사찰로 변경되어 창건되었고 완성된 모습도 미약했기 때문에 그 위상은 아직 높지 않았다. 그렇지만 황룡사 창건은 궁궐이 사찰로 대치될 수 있을 정도로 불교가 왕권에 중요한 수단이었음을 보여주었고, 월성 동편 일대의 왕경 확장의 단초가 되었던 점에서 중요한 사건이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6세기 후반 皇龍寺 가람의 변천 과정
Ⅲ. 新宮 조영 시도와 사찰로의 전용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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