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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이영호 (경북대학교)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43권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1 - 44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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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신라 왕경에서 고려의 지방도시로 떨어진 역사도시 경주의 모습을 살펴본 것이다. 그래서 신라 왕경은 어떻게 소멸되고 어떻게 지방도시로 재탄생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그 격변기의 변화상을 그려보았다. 삼국통일 후의 신라 왕경은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178,936호라는 인구가 말해주듯이 사람과 물화가 집중된 거대한 국제도시였다. 9세기 말 헌강왕대에는 서울에 백성의 집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민간에서는 기와로 지붕을 덮고 짚으로 잇지 않으며, 숯으로 밥을 짓고 나무를 쓰지 않았다. 또한 京師에서 海內까지 집과 담장이 연이어 있고, 草家는 하나도 없었다고 묘사하였다. 이로써 신라 왕경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외관상의 번영을 나타내며, 생산도시에서 거대한 사치성 소비도시로 변한 왕경의 실태를 말해줄 뿐이었다. 급기야 진성여왕 3년(889)에는 貢賦가 들어오지 않아 이를 독촉하자 사벌주에서 처음 반란이 일어났다. 나아가 본격적인 후삼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신라는 급격히 쇠퇴하였다. 927년의 후백제 견훤의 침략으로 경애왕은 피살되고 신라의 궁궐과 왕경은 약탈당하였다. 후삼국 항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신라 경순왕은 나라를 들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바쳤다. 이에 따라 핵심 지배세력들과 수많은 물화가 개경으로 빠져나갔다. 이제 신라 왕경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떨어졌고, 명칭도 慶州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고려 현종 때 새로운 거점으로서 경주부성이 축조되었다. 도시의 중심도 신라 궁궐 주변이 아니라 서북쪽에 새로 축조한 경주부성으로 이동하였다. 고려시대 축조한 南古壘는 북천의 범람을 막아 도시를 보호하기 위한 제방이란 설과 새로 건설한 읍성을 방어하는 성곽이란 설이 대립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후자의 기능을 가졌다고 판단하였다. 고려시대 경주는 전 왕조 신라에 비해 한적한 도시로 바뀌었다. 신라를 지탱해왔던 왕경의 핵심 인물들은 거의 개경으로 떠났고, 일부 귀족들과 백성들이 남게 되었다. 인구가 줄고 도시가 퇴락하였다. 궁궐은 방치되고 사원은 폐사되거나 경영이 어려워졌다. 그런 가운데 일부 새로 창건된 사원도 나타났다. 그러나 신라 호국불교의 상징 황룡사 9층탑은 여러 차례 개축되면서 유락 시설로 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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