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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강식 (한국해양대학교)
저널정보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해항도시문화교섭학 해항도시문화교섭학 제26호
발행연도
2022.4
수록면
129 - 165 (37page)
DOI
10.35158/cisspc.2022.04.2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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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에 조선 표착민이 일본에 표착하면 국가 권력 사이의 외교권 속에서 형성된 송환체제에 의해서 규정되었다. 조선전기에는 일본 중세 국가의 국가 권력이 일원화되지 못하여 조선과의 다원적인 체제가 작동하였지만, 조선후기에는 일본 근세 국가가 외교권을 독점함으로써 표착민 송환에서 단일체제가 작동하였다. 하지만 조선은 일본과의 교린체제로 유지함으로써 조선과 對馬島사이의 조공적 관계를 유지하는 이중 구조를 계속 유지하였다. 이에 대마도의 양속성을 배제하고 표착민 송환을 말하는 것은 국가이념만을 강조하는 입장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입장에서 동북아시아 조일 해역에서 발생한 표착민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국가와 국가의 문제였지만, 동시에 국가와 지역의 문제였다. 그러나 전근대시기에 지역과 지역 사이의 직접적인 교섭보다는 국가를 통한 간접적인 절차와 교섭이 진행되었다. 이에 경상도 해안에서 표류하여 일본 해안에 표착한 조선의 경상도 표착민도 대마도와 부산이라는 지역을 통한 접촉과 교섭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에도 불구고, 시제로는 중앙 권력에 의해 해결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후기에 조일 사이에서 표류민이 발생했던 표류 해역은 지리적〮물리적 해역의 존재를 말해준다. 경상도 연안에서도 표류가 발생하는 원인은 연안의 돌풍이나 강풍이었는데, 조류나 기상이변을 주목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경상도 연안에서 가장 많은 표류사고를 당한 울산인들의 40%가 나가토 이와미 치쿠젠에 표착했으며, 장기 경주 영해 영덕인들은 대마도보다도 나가토 이와미 치쿠젠에 많이 표착하였다. 조일 해역에서 발생했던 경상도 표류민은 조선후기의 사회경제적 변화 속에서 어업 활동보다는 상업 활동을 하다가 표류당하는 경향이 높아갔다.
조선후기에 일본에 표착한 조선인의 송환 문제는 표착지였던 일본과 송환지 조선에서 두 차례 진행되었다. 일본에서 연안 표착민을 조선으로 송환하는 절차는 도쿠가와 바쿠후 주도로 행하였다. 일본의 혼슈나 큐슈에 표착했을 때는 나가사키로 보냈는데, 나가사키에서 쓰시마를 거쳐서 조선으로 송환되었다. 반면 쓰시마에 표착했을 때는 우선 후츄로 보내졌으며, 여기에서 와니우라나 사스나를 경유하여 동래로 송환되었다.
조선에서는 조선후기에 쓰시마에서 표차왜를 앞세워 조선인 표착민을 송환해 오면 접대는 경상도의 동래에서 진행되어 지역에서 많은 부담이 되었다. 구체적인 절차는 격군과 초탐장이 선박의 모양과 척수를 부산첨사에게 먼저 알리면, 부산진에서는 선박들을 초량왜관으로 인도하도록 한 후 구체적인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동래부는 훈도와 별차가 가져온 서계와 노인을 예조에 보내어서 차왜 접대가 타당한 지의 여부를 검토한 후 접대하였다. 보통 茶禮, 下船宴(入船), 上船宴(出船)의 절차에 따라 연회를 모두 베풀어 주었는데, 鄕接慰官은 경상도의 수령이 맡아 진행하였다.

목차

Ⅰ. 머리말
Ⅱ. 조선후기 경상도 주민의 일본 표착
Ⅲ. 조선후기 경상도 주민의 송환과 해역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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