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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수원교회사연구소 교회사학 교회사학 제3호
발행연도
2006.1
수록면
101 - 151 (51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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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치명사적》 등 교회기록에 의하면, 병인박해기 남양도호부 관내에서는 1867년과 1868년에 각각 1명과 3명 등 모두 4명의 남양 이웃고을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서 교수형(絞首刑)을 당하여 순교(殉敎)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동시기 경기도 남부 지역에서 천주교 신자들이 순교한 주요 장소인 수원이나 광주는 물론 죽산 고을 등에 비해 월등하게 작은 수치이다. 이같은 현상은 해당시기 이 고을에 부임했던 수령들이 천주교 박해에 대해 미온적이었고, 향촌 사회의 여론도 특별히 반천주교적(反天主敎的) 성향이 강하지 않았던 데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1790년대부터 1801년 신유박해 때까지는 이경명(李景溟), 이석(李晳)과 같은 반천주교적 인물이 남양에 부임하였고,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에 입각한 향촌사회의 감시망도 두터웠기 때문에 제관득(諸寬得)과 같은 주요 신자가 구포(鳩浦) 지역의 친척 집에서 체포되기도 했다. 1871년 5월 신미양요 직후에는 서양세력과 직접 전투를 벌였던 대원군의 심복 안기영(安驥永)이나 이용의(李容儀) 같은 반천주교적 성향이 강한 인물이 수령으로 부임하여, 천주교 신자들이 이 고을의 서해안 일대에서 서양 선박과 내통하지 못하도록 철저한 단속을 벌였는데, 이때 남양 고을에서도 이전까지와는 달리 강력한 박해정책이 실시되어 상당수 신자들이 생매장형(生埋葬刑)을 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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