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원재연 (천주교 수원교구 유지재단 소속 수원교회사연구소)
저널정보
수원교회사연구소 교회사학 교회사학 제1호
발행연도
2004.1
수록면
227 - 271 (45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9)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박해시대의 남한산성에는 광주유수를 그 총책임자로 하고, 판관을 그 일상적․실질적 지휘관으로 하는 포도군관청이, 어영청 등 군사훈련 기관 및 군뢰청 등 군사감옥 등과 함께 존재하고 있었다. 또한 이곳에는 광주 고을뿐만 아니라, 수어사(守禦使)를 겸대한 광주유수의 지휘 하에 있던 양주, 여주, 이천, 양근, 양지, 양성, 안성, 죽산 등 경기도 동부 지역의 14개 고을 등에서 잡혀온 많은 신자들이 체포 투옥된 감옥이 포도군관청, 군뢰청 등과 인접하여 위치하였고, 남옥과 여옥이 각각 구별된 형태로 최소한 2곳 이상 있었다. 이 옥에서는 포교와 포졸들의 토색질과 비인간적인 침학 행위로 많은 신자들이 순교와 배교의 갈림길에서 갈등하였고, 주뢰질을 당하거나 신장(訊杖)을 맞아 무수한 피를 흘리며 장살되거나, 추위와 주림과 질병에 걸려서 옥사하기도 하였다. 기해박해 때 체포되어 남한산성의 형옥에 갇혔던 구산 출신의 김문집 베드로는 무려 19년 5개월간이나 남한산성 형옥에 갇혀 있다가 특사로 석방되었으나 1868년 구산의 조카들과 함께 다시 남한산성으로 끌려와서 순교하였는데, 그에게 있어 고통스런 감옥은 영혼의 정화소였고 순교를 위한 신앙학교였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