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원재연 (천주교 수원교구 유지재단 소속 수원교회사연구소)
저널정보
수원교회사연구소 교회사학 교회사학 제2호
발행연도
2005.1
수록면
47 - 92 (46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9)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1789년 정조(正祖)가 그 생부 장헌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을 양주 고을로부터 수원의 옛 읍치인 화산(花山) 아래에 이장함으로써, 1793년 수원은 도호부(都護府)에서 유수부(留守府)로 승격하였고 유수(留守), 판관(判官), 중군(中軍)을 그 골격으로 하는 관료조직이 형성되어, 천주교 신자들의 색출과 신문, 처벌을 담당하였다. 동시에 ‘효원(孝園)의 고을 사람’이라는 자부심과 충․효․열(忠孝熱)의 수직적인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성리학(性理學) 지상주의가 고취되면서, 국왕의 명령을 거역하는 천주교회는 패륜적인 집단이라는 인식이 다른 어느 지역보다도 팽배해졌다. 그리하여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이전에 이미 수원 고을에 복음이 전파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이 강력하게 실시됨으로써, 1817년 샘골에 살던 천주교인 이용빈이 친척들에게 살해되는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신앙공동체의 형성은 상당 기간 억제되었다. 수원고을에서는 전국적인 박해였던 신유박해, 기해박해 때까지 관가의 공식적인 박해에 의한 순교자가 없다가 병인박해 때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박해 초인 1866년에는 주로 참수형이나 장살형 등이 수원성 남문 밖, 동남각루 등지에서 공개적으로 집행되다가, 1867년부터는 감옥(監獄)이나 중영(中營, 즉 討捕廳)의 울타리 내에서 주로 이루어지던 교수형(絞首刑)으로 순교하는 분들이 많아졌고, 백지사(白紙死)나 옥사(獄死)로 인해 순교하는 분들도 다수 발생했다. 총 76명에 이르는 병인박해 수원 순교자들의 70% 가량이 1866년부터 1868년까지의 기간 중에 몰려 있는데, 이는 동기간 수원에서 가까운 덕산(德山)의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미수사건의 영향으로 보인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0)

참고문헌 신청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