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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박지현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저널정보
백제학회 백제학보 백제학보 제25호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159 - 184 (2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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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660년 신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정벌한 후 그 땅에 기미지배기구를 설치하였다. 당의 이민족 지배에적용된 기미정책은 정벌한 이민족 지배층을 당의 지방관제에 포섭, 도독·자사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것이었으며, 이는 백제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멸망 직후의 상황을 기록한 사료들을 살펴보면 당이 백제의 5방에 5도독부를 설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때 웅진도독부는 북방성이었던 웅진에 두어졌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660년 8월부터 일어난 백제부흥운동으로 인해 당의 백제고토 지배정책은 대대적으로 수정되었다. 당은 애초에 5도독부를 설치하고 이를 도호부가 관할하게 함으로써 백제 전역에 대한 지배계획을 세웠지만, 부흥운동이 발발하면서 당의 지배력은 사비와 그 근방으로 한정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5도독부가 정상적으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다만 유인원과 유인궤가 도호부가 있던 사비를 떠나 웅진을 거점지로 삼았던 것을 보면 웅진도독부는 그대로 웅진에 남아 유지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백제부흥운동 진압 과정에서 신라가 백제영역의 일부를 차지하게 되면서 기존의 5도독부 체제는폐지되었고, 당은 회맹을 통해 신라의 백제영역 차지를 인정하고 남은 백제고토를 1도독부-7주-51현으로재정비하였다. 사료에 도독부의 명칭은 남아있지 않지만, 이 시기 백제고토 지배를 총괄하고 있던 최고위 관직명이 ‘웅진도독’이었으므로 1도독부의 명칭은 웅진도독부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앞서 660년 5도독부 중 하나로 북방 웅진성에 설치되었던 것과 달리, 1도독부 시기의 웅진도독부는 사비에 설치되었다. 웅진(공주)가 도독부 관할 영역이 아닌 동명주 관할 영역에 속해 있다는 점, 도독부 관할 하 속현들의 위치가 부여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우이현과 관련된 목간이 부여에서 출토되었다는점, 부여가 백제의 마지막 수도로서 영역지배의 중심지로 활용하기 효과적이었다는 점, 부여에서 대당명 와당이나 유인원기공비 등 당 관련 유물들이 여럿 출토된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따라서 1도독부체제 전환 이후 웅진도독부의 치소는 부여에 두어져 백제고토지배의 중심으로서 운영되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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