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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준형 (경상대학교)
저널정보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영남학 영남학 제63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263 - 301 (39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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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18,19세기 善山府 출신 무관 盧尙樞의 역정을 기록한 『盧尙樞日記』를 토대로, 다방면에 걸친 그의 禁養활동을 살펴본 것이다. 朔州府使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던 그는 고향을 떠나 서울이나 임지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았지만, 잠시 고향에 돌아와 머무는 동안에는 墳山수호나 문중 일 이외에 금양활동에도 상당한 관심을 쏟았다. 그런데 노상추와 그의 부친은 선산부 내의 여러 마을로 옮겨 거주했던 인연으로 인해 해당 마을의 금양 문제에도 간여하게 된다. 게다가 분산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어 분산수호나 분산의 산림을 금양하는 활동도 여러 곳에 걸쳐 나타나게 된다. 노상추는 분산 침범을 막기 위해 각 분산에 산직을 두어 묘와 금양목을 보호하려 했다. 그의 분산에 대한 적극적인 금양활동은 여러 곳에 걸치지만,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부친의 묘가 자리한 백련동에 대한 금양활동이다. 그는 금양을 위해 분산 주위나 집 부근에 수목이나 그 씨앗을 심어 금양목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분산에서 금양한 수목이나 수초를 문중 사업이나 자신의 소용처에 사용하거나 판매하여 경제적 부를 축적하기도 하였다. 노상추는 마을 단위의 여러 금양활동에도 적극적으로 간여하였다. 자신이 거주하지 않던 省谷洞의 금양활동 이외에 月鶴松稧 및 그가 별업을 조성한 白雲洞의 송계에도 적극적으로 간여하였다. 이처럼 그는 자신이 사는 동네 및 간접적 관련이 있는 동네의 금양활동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자신의 입장을 관철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금양활동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고향, 자신이 사는 면 지역에 접한 華山과 冷山이라도 封山으로 지정하여 금양을 강화해야 한다고 믿고 있었다. 그래서 노상추는 1825년부터 양 산의 봉산지정을 위한 활동에 본격적으로 착수한다. 그 해 8월 노상추는 수령을 만나 설득하고 주민으로 하여금 정소하게 하였다. 1826년 6월 감영에서도 이를 허용하는 절목을 만들어 내려보냈다. 그런데 난데없이 향교가 제동을 걸고 나서 일이 무산되는 듯했다. 그러다가 1828년 6월 화산․냉산 골짜기를 비롯한 곳곳이 비로 인해 산사태가 나고 주민이 피해를 입자, 노상추는 다시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간여하기 시작한다. 면민들이 관아에 정소하여, 관에서 면민의 금양을 보장하는 문건이 내려졌다. 양 산 금양과 관련된 완의․절목 등이 마련되기도 했다. 노상추의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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