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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최슬기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저널정보
한국고대학회 선사와 고대 선사와 고대 제52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53 - 86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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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書』 韋賢傳에는 漢이 衛滿朝鮮과 전쟁을 벌인 사실에 대해 “東으로 朝鮮을 쳐서, 玄菟·樂浪(郡)을 세워 匈奴의 왼쪽 팔을 잘랐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일찍부터 衛滿朝鮮과 匈奴의 관계가 상정되어 왔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직접적인 자료가 제한적이었던 까닭에 그 구체적인 관계에 대한 논의는 진전되지 않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衛滿朝鮮과 匈奴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구명해 보고자 하였다. 기원전 2세기는 衛滿朝鮮과 漢, 그리고 匈奴가 각자 세력을 확장시키며 상호 교섭·충돌한 시기였다. 건국 이래 匈奴에 대하여 수세적 입장을 취한 漢은 武帝代에 정책을 전환하여 匈奴와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漢이 衛滿朝鮮을 ‘匈奴의 왼쪽 팔’로 인식했는데 이는 匈奴를 경제적으로 지원했던 西域諸國을 ‘匈奴의 오른쪽 팔’이라고 본 것에 대응된다. 이를 통해 衛滿朝鮮과 匈奴의 관계가 西域이 匈奴와 가졌던 경제적 관계에 준하는 영향력을 지닌 것으로 漢人에게 인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衛滿朝鮮과 匈奴의 구체적 관계를 유추할 수 있는 자료로 기원전 2세기경에 저술된 『淮南子』의 ‘匈奴出穢裘’라는 기록이 있다. 이 穢는 前漢代 사실을 전하는 『史記』, 『鹽鐵論』, 『漢書』, 『後漢書』 의 기록을 통해 검토한 결과 穢(穢貉) 朝鮮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穢(穢貉)는 朝鮮으로 인식되기도 하였던 점을 알 수 있었다. 한편 漢武帝 시기에 衛滿朝鮮을 濊州로 표현한 것을 통해 기원전 2세기경 濊가 衛滿朝鮮의 異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기원전 2세기 무렵 漢人에게 穢(濊)로 인식된 衛滿朝鮮이 匈奴와 가죽(裘)을 교역했을 것이며, 이러한 사실이 ‘匈奴出穢裘’라는 기록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토대로 살펴보면 穢裘의 실체는 ‘發朝鮮의 文皮’(『管子』)와 ‘文豹’(『三國志』 東夷傳 濊條)의 사례를 고려할 때 표범 가죽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穢裘는 匈奴에게 있어 교환가치나 희소가치가 높은 貴重品·奢侈品 혹은 威勢品(prestige goods)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衛滿朝鮮과 匈奴의 가죽교역은 威勢品 交易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교역은 衛滿朝鮮과 匈奴의 세력권역이 겹쳤던 遼東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당시 遼東 지역은 匈奴로 인한 피해가 극심했다. 또한 衛滿이 朝鮮으로 망명한 뒤 세력을 키우기 시작한 곳도 遼東이었다. 이곳에는 당시 漢의 遼東郡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武帝 이전까지는 실질적인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 衛滿朝鮮과 匈奴가 遼東을 경유하여 穢裘를 교역할 수 있었다고 판단된다. 특히 遼東을 세력기반으로 둔 匈奴의 左賢王 세력과 교역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漢書』 韋賢傳의 기록은 衛滿朝鮮과 匈奴가 가죽을 교역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군사·정치적 우호관계를 맺었던 사실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본고에서 검토한 것처럼 威勢品 交易을 상정한다면 양자의 정치적 관계는 더욱 밀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관계가 衛滿朝鮮이 ‘匈奴의 왼쪽 팔’이었다고 표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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