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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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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인범 (동국대학교)
저널정보
동국역사문화연구소(구 동국사학회) 동국사학 동국사학 제62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67 - 229 (6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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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 왕조 시대에 편찬된 관찬 및 사찬 사서에 조선 태조의 종계문제나 倭 事를 기록한 서적이 적지 않다. 다만 그 경우 역사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 그 주요한 원인은 조선 역사에 대한 몰이해이다. 그 다음으로는 조선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선행 사적들의 오류를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발췌하여 인용하여 서술한 경우이다. 셋째는 조선의 오류 시정의 요구와 황제의 수정이나 개편지시가 있었음에도 어떤 숨은 정치적 의도에 의해 오랜 기간 수정되지 않고 편찬된 경우도 있다. 명조 사적에서 문제가 된 것은 네 가지 요소였다. 첫째는 태조 이성계의 가계, 둘째, 이성계의 弑逆 혹은 찬역을 통한 조선 왕조의 창립, 셋째는 倭事 항목으로 부산이 일본 영토였고 조선이 대마도에 조공을 바쳤다는 점, 넷째, 선조가 시와 술을 즐겨 임란을 자초하였다는 것이었다. 이렇게 조선 종계의 곡필 해결에 신경을 곤두세운 조선은 태종 4년(1404)부터 선조 21년(1588)까지 명 황제에게 주청하여 개정을 요구하였다. 이 조선의 끈질긴 요청은 거의 200년이 지나서야 만력 『大明會典』에서 수정되어 조선에 반포되면서 종결되었다. 하지만 종계 문제는 해결을 보았으나 명성 있는 석학들이 엮은 사찬사서에는 여전히 오류가 존재하였다. 『續文獻通考』·『吾學編』·『經世實用編』·『弇山別集』·『大政紀』 등은 칙서를 받들어 찬집한 것이기도 하고, 혹은 여러 官司의 典故가 되기도 하여, 館閣의 유학자들이 이 책을 열람하거나 증거로 삼기도 하여 正史와 다름이 없는 책이었다. 종계에 대한 문제는 『명사』에서 해결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왕조가 교체된 후인 청 康熙연간(1662~1722)에 鄭元慶(1660~1734)이 편찬한 『二十一史約編』에서도 오류를 범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인지한 조선 철종은 世系를 곡필하고 있는 서적의 수정을 요청하자, 同治帝는 『명사』가 찬수되기 이전에는 시골서당의 글을 엮는 士들이 견문이 적확하지 않아 벌어진 일이라고 치부하였다. 이 서적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통행되지 않아 개수나 삭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 각 省의 學政에게 알려 각 府·州·縣學에 통지하도록 조치하였다. 아울러 조선의 세계 등은 『명사』를 전거로 삼도록 조치하는데 그쳤다. 청대에 간행된 서적들의 특징의 하나는 『속문헌통고』나 『황명경세실용편』의 잘못된 부분이 상당히 삭제되었다고 할 수 있으나, 다만 조선의 군신이 詩와 술을 즐기면서 국방에 소홀하다는 등의 비난조의 표현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 조선에서 문제시 된 부분은 부산과 대마도 관계의 설정이었다. 청대의 서적에는 부산이 일본영토였으나 조선에 버렸고, 일본이 조선을 도와 압록강 북쪽의 땅을 되찾는데 협조하면 부산을 되돌려주겠다고 한 점, 선조가 시와 술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여 임란을 초래하였다는 등의 기술 태도를 조선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다. 더한 사실은 조선이 대마도에 조공을 바쳤다고 하는 서술이었다. 이러한 왜곡을 초래한 서적의 저자는 대체적으로 강남 출신이었다. 이들에게 영향을 준 인물은 江戶시대 후기의 安藝 출신인 賴山陽(1781~ 1832)이었다. 1806년에 『新策』을 집필하였다. 후에 이를 補訂·재구성하여 1830년에 27편의 『通議』』로 간행하였다. 史論의 체제를 취하면서 현상의 정치의 득실에 대해 설명하고, 이후 일본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 정치·경제·군사의 각 방면에서 논한 저서이다. 그의 저서 『日本外史』는 幕府 말기의 尊皇攘夷運動에 영향을 끼쳤다. 명·청대 절강 寧波 등지는 일본과의 서책을 포함한 무역 중심지였다. 아울러 일본의 조공사신은 반드시 절강포정사를 거쳐 북경으로 올라갔다. 절강 항주나 유구로의 출발점인 복건 漳州 등지를 중심으로 펼쳐진 중국과 일본의 교류 속에서 일본 서적의 중국 유입, 혹은 왜구에 대한 인식이 중국학자들에게 무비판적으로 인용되어 조선 역사의 왜곡으로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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