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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안자코유카 (立命館大學)
저널정보
호남사학회 역사학연구 역사학연구 제81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97 - 120 (2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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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일본군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을 치른 조선인 병사들을 주 분석대상으로 하였다. 중일전쟁의 전면화(1937년 7월)를 계기로 식민지배하의 조선인들에 대한 병력동원이 급작스럽게 결정된 이래, 일제의 패전까지 약 10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일본군에 동원되었다. 이 조선인 병사들의 전쟁경험은 동원시기나 방법, 배속군대에 따라 크게 달랐다. 조선인이 일본군으로 동원된 방법은 각양각색이었지만 대개 직업군인(장교), 지원병, 징병 등의 범위 내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중에서도 지원병은 징병보다 장기 종군을 하면서 가장 가혹한 전선(前線)으로 보내졌다. 그들 대부분은 조선군에 배속되었는데, 조선군 예하 보병연대의 주력부대는 전황이 일층 가혹해지고 있던 1943년 이후로 동부 뉴기니아 전선이나 필리핀 전선으로 전출되어 패전 때까지 계속 머물렀다. 본고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 전쟁기념관에 소장된 신자료를 통해 3인의 조선인 지원병의 경험을 분석하였다. 한 사람은 전사한 금광재면(金光載冕)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살아 돌아온 유기화(劉琦華)와 C(장병묵(張炳默)으로 추정)이다. 이 3인은 같은 조선군 제78연대에 소속되어 1943년에 뉴기니아 전선에 보내졌는데, 뉴기니아 전선에서 제78연대 병사의 생존률은 9%에 불과하였다. 金光載冕은 전투에서의 부상으로 입은 상처로 전사하였는데, 그가 소속했던 제1포병소대의 57명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은 단 한 사람뿐이었다. 유기화는 제2중대 소속으로 조선인 조장(曹長, 한국군의 ‘상사’에 해당)이었던바, 전후에는 한국전쟁때 한국군에 입대하였다가 1974년에 준장으로 제대하였다. 그가 남긴 구술기록에는 뉴기니아 전선의 비참한 상황이 묘사되어 있다. C는 오스트레일리아군의포로가 되어 심문기록을 남겼다. 이상의 3인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식량이 떨어져 인육을 먹기까지 한 뉴기니아 전선의 끔찍한 상황을 목도하게 된다. 아시아태평양전쟁 중, 일제의 패전 직전의 소련 국경 근처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한반도가 공습을 받는다든지 전쟁터가 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많은 조선인에게 ‘전쟁체험’이라 하면 차라리 한국전쟁을 의미한다. 이에 비해 지배민족인 일본인들 틈에 끼어 죽음 직면의 쓰라린 경험을 했던 조선인 지원병들은, 징병이나 노동력 강제동원 등의 동원 피해에 비해 주목을 받지 않았다. ‘지원’이라는 명칭으로부터 식민지하에서 일본에 대한 협력자라고 인식되는 경우도 있었다. 전후에는 ‘일본군에 지원한 매국노’로서의 친일파 딱지가 붙어 끊임없이 비판을 받았다. 또한 국적문제 때문에 일본정부의 전후보상 대상에서도 제외되어 왔다. 조선인 지원병들은, 친일과 항일 사이의 깊은 골짜기로 추방된 존재였던 것이다. 한편, 류기화나 C 등 지원병의 경험과 전사한 전우들의 기념비의 일본 건립을 청원한 이들의 행동은, 단순한 틀로 평가하거나 분석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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