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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손영문 (문화재청)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미술사 제56호
발행연도
2021.1
수록면
47 - 73 (2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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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령사 석굴은 하서주랑에 개착된 석굴로, 동서문화의 교착점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일찍부터 불교가 교류하며 불교교학 뿐만 아니라 불교미술사상 의미 있는 작품들이 조성되었다. 병령사 석굴에서 가장 중요한 석굴은 제169굴로, 이 석굴은 개착 당시의 신앙을 알려주는 불상과 수행자의 흔적이 벽화로 남아 있어 석굴연구에 있어서 절대적인 자료를 제공한다. 병령사 석굴은 영이(靈異)롭게 생긴 암벽에 형성된 천연 동굴을 이용하여 수행자들이 드나들며 예배존상을 조성하고 관불수선하므로서 그 시작을 알렸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에 있는 골굴 석굴은 초기의 신앙모습을 알려주는 자료는 남아 있지 않지만, 마애대불의 존재나 그 주변으로 형성된 크고 작은 천연의 석굴은 병령사 초기 석굴과 유사점이 많다. 법흥왕대 불교가 공인된 이래 수도 경주의 곳곳에는 가람이 건립되고 많은 수행자들와 이를 따르는 신도들이 생겨났다. 수행자들은 불교의 홍포를 위해 대중과 호흡하면서도 불교의 본연의 가르침인 깨달음을 향한 수행에도 소홀하지 않았다. 수행 장소로는 반듯하게 지어진 가람과 더불어 불교경전에서 설하고 있는 숲이나 나무아래, 수려한 바위굴 등도 선호되었다. 이렇듯 병령사 석굴이나 골굴 석굴은 천연의 수행 장소였다. 이곳은 대규모 인원이 들어 가 불상을 예불하거나 설법을 할 수 있는 공간은 아니지만, 일념으로 구도행각을 벌이는 수행자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초기 병령사 석굴의 기록을 보아도 주로 수행을 위한 몇 몇의 이승(異僧)들이 드나들며, 불상을 만들고 일념으로 관하며 깨달음의 경지로 나아가고자 했다. 병령사 석굴이 그러했듯이 골굴 석굴도 이와 같은 신앙 형태를 띠었을 것이다. 즉 불상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는 단석산 마애불상군이나 경주 남산의 삼화령 석굴, 불곡 석굴, 탑곡 마애조상군 등 삼국시대 석굴사원과 마찬가지로 골굴 석굴의 수행방식도 불상을 일념으로 관하고 칭념하며 궁극의 목적인 깨달음의 세계로 나아갔을 것이다. 한편 병령사 석굴의 상징인 미륵대불은 당대에 조성되고, 골굴 석굴의 상징인 마애대불도 통일신라 9세기대에 조성된다. 수많은 석굴을 대표하여 큰 규모의 상징을 조성하는 사례는 당대에 들어서서야 본격화 된다. 상징불로 선택된 도상은 대개가 의좌세를 취한 미륵불이 많으며, 그것은 정치권력의 정치적인 야망과 결부되는 경우가 많았다. 미륵은 석가여래 이어 下生하는 부처이지만, 그가 하생할 시점은 곧 불교의 이상적인 군주 전륜성왕이 치세하는 시절이어야 하므로 정치화하기 매우 좋은 신앙이었다. 골굴 석굴의 마애대불은 도상과 신앙적으로 석가여래로 판단되고 있고, 조성시기 9세기 후반으로 보고 있다. 신라 9세기 대는 왕족들 간의 왕권쟁탈로 인해 정치·사회적으로 대단히 불안한 시기였다. 사회적으로 불안한 시기에는 시대를 막론하고 미래불 미륵신앙이 급부상하고 각광을 받았다. 아마도 마애대불이 조성되던 시대를 통찰하면, 이 마애대불을 조성한 조성자는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뤘던 문무대왕릉이 조망되는 곳에 새로운 세상과 시대를 갈망하며 미륵대불을 조성하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그 원류와 조성배경은 둔황이나 병령사, 천제산 등 당대 조성된 대불신앙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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