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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한문학회 한국한문학연구 한국한문학연구 제77호
발행연도
2020.1
수록면
9 - 42 (3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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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유림에게 금강산 유람은 평생 한 번은 이루고 싶은 소원이었으며 누구나 원하는 일이었으나 쉽사리 이루기 힘든 일이기도 했다. 고려 시대 李穀의 「東遊記」를 시작으로 18세기까지 수십 명의 인물이 금강산을 유람하고 남긴 기록들이 이를 증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금강산은 시대가 흐르면서 조금씩 더 접근하기 쉬운 공간으로 바뀌고, 그 내에서도 예전에 보여 주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들을 보여 주며, 유람도 좀 더 적극적으로 변화하여 오늘날 여행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금강산으로 가는 길에 있어서 17세기 이전과 18세기를 비교한 변화에는 첫째 한양에서 금강산을 찾아가는 경로의 변화는 거의 없었다는 점이며, 둘째는 유람기일에 대한 변화로 전체 유람 기간이 많이 길어졌으며 유람에 나선 사람들이 이전보다 압도적으로 많아졌다는 점 등 다섯 가지 정도의 변화가 나타났다. 금강산 내에서의 변화로는 첫째 전체 유람 기간 중 금강산 내에서 머문 기간이 5~6일로 가장 높은 빈도를 차지하며 10일 이상 머문 사람들이 그다음을 차지할 정도로 금강산에 머물며 유람한 기간이 길어졌다는 점이다. 둘째는 17세기 이전까지 주로 유점사에서 외산의 유람을 시작했는데, 신계사가 외산 유람의 시발점과 종착점이 되었다는 점 등 네 가지 정도의 변화가 나타났다. 삼일포, 해금강, 총석정의 유람에서 삼일포 유람은 이전에 비교해 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1714년 이하곤의 「東遊錄」에서 해금강이라는 명칭이 처음으로 등장하고, 삼일포 동쪽의 바다를 해금강이라 일컫게 된 점은 큰 변화이다. 또한 거리상의 이유로 많이 찾지 않았던 총석정을 더 많은 이들이 찾게 되었다는 점도 이전과는 다른 변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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