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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준배 (해군사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68집
발행연도
2020.5
수록면
149 - 186 (38page)
DOI
10.18496/kjhr.2020.05.68.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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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무라 히데타카는 1925년 한반도에 건너와 이후 1945년에 귀국하기까지 20여 년간 한반도에 거주하면서 한국사를 연구한 전문가로서,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에서 『조선사』 편찬을 담당한 실무자였으며, 1933년 이후부터는 경성 제국대학에서 〈조선 근세사〉를 강의한 ‘관학 아카데미즘’에 속한 인물이었다. 그러한 만큼 그의 이순신 저술에는 그 당시의 조선총독부의 시책의 영향이 보이며, 이는 그의 위치를 고려하면 당연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가 이순신에 관해 처음 서술한 것은 1928년 이순신 종손가에서 확인한 이순신 관련 유물에 관해 적은 보고서 형식의 글, 「충무공 이순신의 유보-조선역 해전사료의 발견」에서였다. 그는 이 글 속에서 이순신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이순신을 가리켜 ‘임진왜란에서 일본군이 실패한 원인’이고, 최근 ‘동양의 넬슨’이라고 칭해지고 있다고 서술한다. 그러나 그의 저술 속에는 당시 그의 상황과 깊은 연관성이 보이는 표현이 여럿 보이며, 이를 살펴보는 것은 문화통치 시기 관학 아카데미즘에 속한 인물이 이순신을 어떻게 그려냈는가에 대해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그는 3·1 운동 이후 고조되고 있던 조선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해 시작된 『조선사』 편찬사업의 실무자였다. 따라서 그가 이순신 종손가로부터 제공받은 관련 사료에 대한 보고서를 조선인 구독자가 적지 않은 『조선』에 발표한 것은, 이것이 편수회가 진행하고 있었던 조선사 편수사업 홍보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조선인 구독자를 대상으로 조선 구국의 영웅 이순신의 유물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발표함으로써 나카무라는 구관 조사사업에 대한 홍보함과 동시에 당시 가문 소장 자료를 반출하는 것에 부정적인 시선을 지니고 있었던 조선인들의 우려를 불식시키고자 했다. 그는 자신들이 이순신 종손가에서 제공한 조선의 고문헌과 유물을 얼마나 소중하게 다루었는가를 보여주어야 했으며, 이를 통해 여타 다른 자료들의 자발적 대여 혹은 기증을 이끌어 내야 했다. 또한 이러한 조선인들의 자료 제공이 객관적인 『조선사』 편찬에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따라서 그는 조선의 민족적 영웅이었던 이순신을 호의적으로 묘사함과 동시에 논란이 될 만한 사항은 삭제하였으며, 이로써 조선인들의 반발을 최소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재조일본인으로서, 또한 조선총독부의 영향 하에 있어서 조선인들의 반응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라 해야한다. 이처럼 문화통치기 조선총독부의 영향 하에 있었던 재조일본인 연구자에 의해 ‘내지’ 일본과는 다른 특수한 이순신 담론이 생성되었다. 이러한 이순신 서술 방식은 1928년 나카무라의 저술에서만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이 당시 일본 문헌 속 이순신 서술의 하나의 특징적 담론으로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목차

【국문초록】
1. 서론
2. 「충무공 이순신의 유보」 속 이순신
3. 관학 아카데미즘의 이순신 서술
4. 결론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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