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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다사카 마사노리 (선문대학교)
저널정보
한일관계사학회 한일관계사연구 한일관계사연구 제67집
발행연도
2020.2
수록면
207 - 236 (30page)
DOI
10.18496/kjhr.2020.02.67.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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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려면 양국이 충분히 협의하여 사행절목 강정이 이루어지는 과정이 필요했다. 무진년(1748) 5월에 에도(江戶)를 방문한 조선통신사의 절목 강정은 1747년 4월부터 시작했다. 전례로 삼을 만한 기록이 없는 구관백전(舊關白前) 예단 및 배례에 관한 문제가 6월에 해결되었다. 그러나 11월이 되어 집정 인원수 문제가 발생했다. 기해년(1719)의 예를 따르면 집정은 4명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 인원수가 5명이 되었다가 결국 6명까지 늘어났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전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인원수 증가에 따라 예단 마련이라는 경제적 부담도 발생한다. 당시 조선은 계속된 흉작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집정의 증가는 조선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항이었다. 따라서 조선의 수역과 일본의 차왜 간의 치열한 협상은 12월에서 해를 넘겨 통신사가 부산을 출발한 2월까지 이어지는 상활이 벌어졌으며, 결국 조선은 집정 5명에게만 서계와 예단을 허락했다.
본고는 치열한 논쟁을 벌이며 양국의 체면을 세우려는 조선의 역관과 일본의 차왜의 협상 모습을 연향신사기록과 조선의 사료를 통해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그 결과 역관 현태익과 홍성구가 문위역관으로 대마도를 찾아가 받아온 집정 인원수에 관한 서장이 조선에 전달되지 못했고, 이에 관한 기록이 조선의 자료에는 없는 사실을 밝혔다.

목차

국문초록
1. 머리말
2. 과거의 집정(執政) 인원수 문제
3. 시작은 예단 매[鷹連] 문제
4. 문위역관에게 전달된 서장의 소멸
5. 재차 결렬 그리고 상선(上船)
6.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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