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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陳政煥 (국립광주박물관)
저널정보
한국문화사학회 문화사학 文化史學 第52號
발행연도
2019.12
수록면
51 - 79 (29page)
DOI
10.29334/MHSH.2019.12.5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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瑞峰寺는 보물 제9호로 지정된 玄悟國師塔碑(1185년)가 있으며, 조선 태종 때에는 資福寺로 지정되기까지 한 이 지역의 거점 사원이었다. 이러한 서봉사지에 대해 2012년부터 2017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6단의 계단식 대지 위에 수많은 건물을 조성하였음이 밝혀졌다.
본고는 서봉사의 佛敎石造美術品을 중심으로 서봉사의 역사를 재구성해보고 그 배경과 의의를 밝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 현오국사탑비와 석탑·석불 관련 불교석조미술품 부재들의 현상과 특징을 파악해보고, 그 조성시기를 유추해보았으며, 서봉사 중건 과정을 재구성하고, 조성배경과 미술사적·불교사적 의의를 밝혀보았다.
이를 토대로 서봉사의 역사를 재구성해보면, 서봉사는 10세기 후반 고려 왕실의 왕권강화를 위해 화엄종 소속으로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 서봉사에는 석탑과 불상이 조성되었는데, 이들은 다음 시기 용인지역 석탑과 석불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185년에는 무신정변과 왕자로서 출가하였던 충희의 비행으로 위기에 처해있던 왕실과 화엄종단은 반전의 기회를 만들기 위해 당시 존경받던 현오국사의 탑비를 화엄종 사찰이었던 서봉사에 건립한다. 다만, 왕실 내 불교에 대한 인식 변화와 더불어 당시의 새로운 사조인 유교적 양식과 규범을 조기에 정착시키기 위해 탑비는 기존의 화려한 장엄을 버리고 왕실의 묘지명과 유사한 형태로 변모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몽골 침입 시 서봉사는 망폐되고 마는데, 개경 환도 이후 권문세가에 의해 절이 중창되면서 화엄종에서 당시 중창주의 소속 종파인 천태종으로 그 소속으로 바뀌고 만다. 한편, 유교를 전면에 내세운 조선에서도 서봉사의 법등은 꺼지지 않았다. 태종대에는 자복사로 지정되기까지 하였다. ‘成化三年’명 기와와 ‘嘉靖三十二年’명 기와에서 알 수 있듯, 15~16세기까지도 가람은 중수되었다. 한편, 전란 이후에도 없어진 비부를 다시 만들고 탑비를 이건하였지만, 결국은 법등은 사그라지고 만다.

목차

요약
Ⅰ. 머리말
Ⅱ. 玄悟國師塔碑의 現狀과 特徵
Ⅲ. 佛敎石造美術品 部材의 現狀과 特徵
Ⅳ. 瑞峰寺址 佛敎石造美術品의 造成背景과 意義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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