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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45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81 - 203 (2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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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사 사적기에 따르면 신라(新羅) 진덕여왕 6년(서기652)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동쪽에 향성사(香城寺)를 창건 하였다. 자장은 계조암(繼祖庵)과 능인암(能仁庵)을 세웠으며 구층석탑을 세우고 불사리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향성사라는 이름은 불교의 중향성불토국(衆香城佛土國)이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다. 1644년에 영서(靈瑞)·연옥(蓮玉)·혜원(惠元) 등이 중창을 발원하던 중, 중창을 서원하고 기도 정진 중 비몽사몽간에 백발신인이 나타나서 지금의 신흥사 터를 점지해 주며 “이곳은 누 만대에 삼재가 미치지 않는 신역(神域)이니라” 말씀 하신 후 홀연히 사라지는 기서(奇瑞)를 얻고 절을 중창하니 지금의 신흥사이다. 절 이름을 신인(神人)이 길지(吉地)를 점지해 주어 흥왕(興旺)하게 되었다 하여 신흥사(神興寺)라 한 것이다. 선정사 옛터 아래쪽 약 10리 지점에 다시 절을 짓고 이름을 신흥사라 하였다. 1965년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가 되어 양광·속초·강릉 등지의 사암을 관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이 절의 주지를 지냈던 성원(聲源)이 대소의 당우들을 거의 모두 중건 또는 중수하였고, 범종을 새로 만들었다. 최근 절이름을 ‘神興寺’에서 ‘新興寺’로 고쳐 부르고 있다. 비문은 염거화상은 도의선사로부터 법을 받은 뒤 억성사(億聖寺)에 머물면서 선법을 선양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여기서 유의할 대목은 도의선사에게 법을 받은 염거화상이 제자 체징(體澄)을 만나 가르쳤다는 것이다. 체징은 뒷날 장흥으로 내려가 가지산문을 일으키고 설악산문을 계승한 인물이다. 이는 억성사가 설악산문에서는 매우 중요한 거점사찰의 하나라는 것을 알게 해준다. 신흥사는 진전사와 함께 그의 사상을 펼친 곳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홍각선사가 억성사에 머물렀다면 그 선배인 염거화상에게 배웠다는 추론도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홍각선사 억성사에 거주했다면 당연히 염거화상에게 선법의 요체를 배웠다는 가정이 성립한다. 설악산문의 번창과 관련해 또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염거화상이 열반한 곳이 억성사가 아니고 원주 흥법사라는 점이다. 흥법사는 홍각선사의 스승인 현욱선사가 머물던 여주 고달원에서 가까운 절이다. 이는 염거화상이 현욱선사나 그 제자들과 교류가 깊었을 가능성에 대한 단서가 된다. 실제로 당시에는 서로 다른 산문을 찾아가 수행하는 것이 어색한 일이 아니었다. <조당집>에 따르면 현욱선사만 해도 한때 지리산 실상사에 머문 적이 있고, 실상산문의 홍척선사는 설악산에 머문 적이 있다. 이런 사실을 고려하면 가까운 사찰들에서는 자연스러운 왕래가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이런 친연성을 배경으로 선법진흥의 분위기가 확산되었을 것이란 점이다. 신흥사의 창건은 신라(新羅) 진덕여왕 6년(서기652)에 자장율사가 설악산 동쪽에 향성사(香城寺)를 창건 하였으며, 염거화상등이 이러한 전통을 신흥사에 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신흥사는 선종의 법맥을 계승한 중요한 사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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