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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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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온지학회 온지논총 온지논총 제60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151 - 186 (36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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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는 왜구의 침탈이 빈번하여 양반들이 거주하지 않았다. 남명이 산해정을 세워 강학하자 비로소 유교의 풍속이 정착하였다. 산해정은 1530년 건립하여 임진왜란에 소실되고, 그 자리에는 서원철폐령 때까지 신산서원이 있었다. 1818년 서원 옆에 산해정을 복원하였으나 서원철폐령 때 함께 훼철되었다. 1890년 서원이 있었던 터에 산해정을 복원하고 1924년과 1949년 및 1972년과 1993년에 보수하였다. 신산서원은 1588년 건립이 추진되었으나 완공 전에 임란으로 소실되었다. 1609년 산해정 자리에 중창하여 1868년 또는 1871년 훼철 때까지 존속하였다. 그 후 산해정만 복원했다가 1999년 이를 확충하여 신산서원과 산해정의 역할을 동시에 할 수 있도록 하였다. 여기에 남명과 송계 신계성을 향사하고 있다. 산해정과 신산서원의 건립 및 유지 보수에는 그때마다 몇몇 사람이 주동한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서 우리는 역설적으로 산해정과 신산서원이 지역 유교문화의 중심지로서 최소한의 역할은 확인할 수 있지만 유교문화를 확대한 기능은 찾기 어렵다. 남명 생존당시 산해정은 지역 유교문화를 크게 확대했지만, 남명 사후에는 지역적 위치와 적은 유림으로 인하여 그 역할을 점차 잃어간 것으로 보인다. 신산서원 중건은 정인홍의 스승 추숭사업과 연관 있지만 이후 서원의 관리 유지는 지역의 유력한 몇몇 가문과 남명의 처가인 남평 조씨가 담당한 것으로 확인된다. 산해정과 신산서원은 남명을 추숭하는 역할을 하면서 훼철 이전까지 그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훼철 이후 급격히 쇠락했고, 이후 산해정 중건과 중수과정을 보면 몇몇 유지들의 힘에 의해 유교문화의 명맥을 잇는 정도의 역할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는 민관의 노력으로 유교문화의 확산공간으로서 기능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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