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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張日圭 (국민대학교)
저널정보
신라사학회 신라사학보 신라사학보 제55호
발행연도
2022.8
수록면
97 - 124 (28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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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치원 추숭과 평가는 차이가 있었다. 초기에는 뛰어난 문장가로 평가되어 고대 인물로는 가장 많은 글을 선별하여 수록하거나 정몽주・길재・김숙자 이전에 조선 유학의 종통을 이끌어 온 유학자로 강조하였다. 무성서원의 재건, 서악서원의 건립은 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후 서악서원 사액 전후에는 불가나 선가의 지식인으로 정리되어 문묘 배향 인물에 대한 존숭 이상으로 받들지 않았다. 오히려 경주최씨 문중에서 도시조로서 영정과 위패를 모시고는 일가와 일족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거나 선가와 연고되어 곳곳에 ‘친필 석각’을 조성하고 설화와 전승의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최치원에 대한 평가와 존숭은 조선시대 내내 꾸준히 변화하였다. 이 글은 조선시대 최치원 존숭의 내용을 서원을 중심으로 살피고, 그 변화의 특징을 제시하고자 작성하였다.
최치원 관련 서원과 사우 중에 주목되는 곳은 경주 서악서원과 정읍 무성서원, 서산 부성사 등이다. 서악서원은 최치원을 모시는 영남의 대표적인 서원이었고, 무성서원은 역시 호남의 대표적인 서원이었다. 두 서원은 주・배향 인물과 해당 지방의 연고와 함께 물론 지방 교육과 선비 양성을 도모해야 할 해당 지역 지방관에 의해서 건립되었는데, 해당 지역 유림의 공의와 요청도 반영되었다. 다만 서악서원 건립 이후 무성서원이 재건되었고, 서악서원 사액 이후 무성서원이 사액되었다. 서악서원의 건립과 사액은 무성서원의 재건과 사액에 영향을 미쳤다.
서악서원과 무성서원의 건립과 재건에는 정몽주・길재・김숙자로 이어지는 조선 유학의 정통성과 함께 지방관으로서 향촌 교화와 교육을 올바르게 이끌겠다는 조선의 국정운영 방향이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러나 서악서원의 건립과 재건이 조선의 서원 건립 초기에 해당하여 유림의 지지와 연대가 강하게 유지되었던 반면, 무성서원의 그것은 전국적으로 많은 서원이 남설되었던 때였기에 이전과 달리 전국적이라기보다는 해당 지역 선현에 대한 숭봉 의지를 담은 결과로 나타났다. 이것은 건국 초에 뛰어난 문장자이자 조선유학의 종통으로 자리매김되었던 최치원이 점차 불가와 선가에 침잠하였던 유학적 소양이 부족한 문인으로 평가되는 변화와도 밀접히 관련되었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조선시대 최치원 추숭 서원의 분포
Ⅲ. 조선시대 최치원 추숭의 내용과 특징
Ⅳ.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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