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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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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불교미술사학회 강좌 미술사 강좌 미술사 제52호
발행연도
2019.1
수록면
99 - 141 (4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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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 각성(1575~1660)은 청허 휴정(1520~1604)의 淸虛系와 함께 조선후기 불교계의 양대계파인 浮休系 성립의 기반을 구축한 승려였다. 그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전란으로 피폐해진 민심을 사찰의 중창과 佛事를 통해 위로하면서, 조선후기 불교미술 조성의 새 장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각성은 1636 년(인조 14)에 화엄사를 중창하고 이어 하동 쌍계사, 완주 송광사 등 대가람을 중창하였으며, 1646 년(인조 24) 이후 화엄사에 주석하면서 1653 년에 화엄사 영산회괘불도 조성을 주도하였다. 화엄사 영산회괘불도는 24 폭의 모시를 이어 만든 가로 731cm, 세로 1009cm 의 거대한 화폭에 靈山齋의 주불인 석가모니의 설법장면을 표현한 것으로, 효종의 차녀 淑安公主(1636~1673)와 남편 洪得箕(1635~1673)를 비롯한 90 여 명의 연화질과 시주질이 참여하여 조성하였다. 화엄사 괘불도의 조성을 즈음하여 각성을 중심으로 한 벽암문도는 보살사 영산회괘불도(1649), 안심사 영산회괘불도(1652), 영수사 영산회괘불도(1653), 비암사 영산회괘불도(1657) 등 영산회괘불도 조성을 주도하였다. 이처럼 1649 년~1657 년 사이의 짧은 기간 안에 충청, 호남지역에서 靈山會라는 동일한 도상의 영산회괘불도가 다수 조성된 것은 靈魂遷度儀禮인 靈山齋가 조선 후기의 최대의 불교의식으로 자리잡게 되었을 뿐 아니라 관련의식집이 다수 발간되었기 때문인데, 여기에는 각성이 서문을 쓰고 제자 智禪이 편찬한 五種梵音集이 큰 영향을 끼쳤다. 이후 벽암문도의 불사는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18, 19 세기 영산회괘불도의 성행을 이끌어냈다. 따라서 조선후기 영산회괘불도의 성립과 확산에 있어 각성의 역할이 매우 지대했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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