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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서일수 (국사편찬위원회)
저널정보
도시사학회 도시연구 도시연구 : 역사·사회·문화 제22호
발행연도
2019.10
수록면
7 - 44 (38page)
DOI
10.22345/kjuh.2019.1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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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서는 1930년대 ‘北鮮開拓事業’이라는 일제 식민정책이 성진의 도시공간 변동과 연동되는 양상에 대해 다루었다. 이는 여타 북선의 도시들에 비해 백두산 일대에서 벌목된 목재의 집산이 성진의 도시화 과정에서 보다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음을 설명하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 이 글에서는 우선 북선개척사업의 전개과정을 다루었다. 1931년 시작된 북선개척사업은 삼수, 갑산 등 함경남북도와 평안북도의 8개 군에 들어차 있던 삼림을 베어내고(삼림개발) 화전민을 정착시키며(화전민 지도) 이 과정에서 삼림의 보호를 도모하는 사업이었다. 삼림개발 즉, 벌목사업에 유리하도록 척식철도, 삼림철도, 궤도 등을 부설하는 것이 사업의 핵심이었다. 1930년대 중반이 되면 북선개척사업과 연동하여 척식철도로 惠山線(길주-혜산진)과 白茂線(백암-무산)이 구간별로 점점 개통되어 갔다. 1934년에는 성진-혜산진 도로가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수준으로 개수가 완료되었다. 이로써 원래 압록강 · 두만강 수로로 이동하던 목재들은 철로를 따라 성진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또한 해당 철도와 도로 연변으로 풍부한 지하자원이 매장되어 있음이 확인되면서 이들에 대한 운반 수요 또한 상당한 상황이었다.
아울러 이 글에서는 북선개척사업의 영향으로 성진항에 貯木場 시설이 들어서고 해당 시설이 이후 성진 시가지계획 구상에 기반이 되었음을 설명하였다. 북선개척사업으로 인해 성진항은 목재를 비롯한 각종 자원이 呑吐하는 항만으로 중요성이 높아졌다. 밀려드는 목재를 수용할 목적으로 1933년부터 漢泉川 하구에 저목장 시설 및 철도 인입선, 호안공사 등 각종 부대공사가 진행되어 1935년 완공을 보았다. 1936년 공포된 성진 시가지계획 가로망의 핵심노선은 원산-회령 1등 도로, 성진-혜산진 2등 도로의 시가지 구간으로, 이 두 노선은 한천천 우안 한천교 근처에서 교차하여 저목장 시설로 연결되었다. 이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성진 시가도로의 개수 공사는 저목장 시설 인근 목재회사들과 쌍포동 高周波제철공장 부지와도 긴밀하게 연결되었다. 저목장 공사와 연계하여 진행된 성진 시가지 북쪽 한천천 양안의 호안공사 또한 시가지계획 적용 직전 완료됨으로써, 이를 기반으로 마그네사이트공장이 들어선 연호동 일대(제2구)의 토지구획 정리 또한 진행될 수 있었다.

목차

I. 머리말
Ⅱ. 1930년대 ‘北鮮開拓事業’의 전개
Ⅲ. 城津의 도시 공간 변동
Ⅳ.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초록
Abstract

참고문헌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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