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무용연구학회 한국무용연구 한국무용연구 제35권 제4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15 - 144 (30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본 연구는 조선 제23대 임금 순조대 궁중정재(宮中呈才)를 선보인 무동(舞童)의역할을 밝힌 글이다.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대리청정(1827-1830) 기간에는 무자진작(戊子進爵)과 기축진찬(己丑進饌)에서 모두 열 차례의 연향(宴享)이 거행되었다. 그 가운데 7차례는 무동이, 3차례는 여령이 정재를 공연하였다. 실제로 무동의 정재는 무자진작에서 28종목, 기축진찬에서 14종목이 이루어졌다. 그 가운데 처음 독무로 창작된 춘앵전과 무산향을 여령이 아닌 무동에 의해 초연될 정도로 무동의 비중과역할이 컸다. 조선시대 남성무용수를 대표하는 무동은 궁중무용 내지 한국무용사에서독특한 위치를 갖는다. 원래 궁중무용은 삼국 이래 여성이 중심이 되어 발달해 왔다. 고려 때 중국에서 도입한 궁중무용 또한 여령(女伶) 중심의 무용이었다. 이 전통을 그대로 이어오던 조선왕조는 여령 외에 새로이 남성 무용수인 무동을 탄생시켰다. 유교이념에 따라 남녀를 구분하기 위해 출발한 무동은 15세기 이래 꾸준히 성장․발전하여 19세기 초반에 이르면 여령보다 더 높은 기량과 수준을 인정받았다. 그 결과 ‘정재의 황금기’라 불리는 순조대 정재를 주도한 예술인들이 바로 무동이었다. 그런 점에서볼 때 순조대 무동과 무동 정재는 남성무용수의 존재와 역할을 뚜렷이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무용사 내지 한국예술사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42)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