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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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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27권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117 - 156 (4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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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은 중앙에서 호족들을 제압하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는 호족연합정권체제의 해체이자 국왕중심의 집권체제의 기반을 마련한 것이다. 그는 즉위 직후 왕권이 불안하였다. 이를 위해 국초 공역자들에 대한 공훈을 산정하였는데, 이것은 자신의 즉위에 대한 논공행상의 의미도 내포하였다. 그는 불안한 왕권을 극복하기 위한 방책으로 후주와의 외교교섭에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후주의 개혁정치와 왕권강화에 대한 정보를 접하였고 고려에 도입하고자 하였다. 광종은 이를 통해 일련의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그의 이러한 정책들은 호족들의 이익에 반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종이 이를 추진할 수 있었던 데는 시위군 등 무력적 기반을 증강시킨데 기인한다. 그의 시위군 증강 조치는 군제의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광종 11년 군제개편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徇軍部의 軍部로의 개편은 호족적 성격의 군사기구를 국왕중심의 군사기로의 재편을 의미한다. 軍部는 광종의 선발기준에 의해 뽑혀진 시위군을 관장하는 역할을 하였다. 일종의 수도에 주둔하는 중앙군에 대한 군정적 통치를 하는 군사기구였다. 최소한 중앙에서 호족들의 반독자적인 군사지휘권의 소멸을 의미한다. 軍部는 이후 기록에 나타나지 않는 점과 병부의 설명 속에 들어 있다는 점에서 兵部에 통합되었다고 보았다. 內軍은 왕과 왕실의 신변보호와 궁궐의 수비에 더욱 초점을 맞춰 증강되었던 부대였다. 태조대 일리천 전투 당시 중군에 소속된 3軍과 같은 부대였다고 생각하였다. 혜종은 태조의 3군을 제대로 물려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왕규나 정종・광종 등이 왕위를 넘보는 상황까지 이르게 하였다. 그 결과 광종은 무엇보다 우선 수도를 방어하고 궁궐을 수비하며, 왕을 호위하는 부대에 대한 증강조치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 결과 시위군의 증강과 내군의 강화 등이 이루어졌다. 그것이 반영된 것이 순군부의 군부, 내군의 장위부로의 개편이다. 광종이 이러한 군제개편을 단행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적 조치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시위군의 증강은 많은 경제적 비용이 발생하는데, 광종은 이미 국초에 세공액을 정하는 조처를 통해 기존부터 준비를 해 왔다. 그 결과 시위군 증강이 이루어진 광종 11년에 軍需儲積 등 군수비용을 관장하는 관부인 物藏省을 寶泉으로 개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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