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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대구사학회 대구사학 대구사학 제130권
발행연도
2018.1
수록면
319 - 351 (33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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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중엽 스코틀랜드 혁명은 국왕의 부재라는 사상 초유의 사태를 초래하였는데, 당시 의회정부를 구성하여 스코틀랜드 정국을 이끈 정치지도자는 아가일 후작(the 1st Marquess of Argyll)이었다. 아가일은 자신이 가지고 있던 국왕에 대한 인식과 정치사상을 바탕으로 스코틀랜드 의회정부를 이끌어갔다. 그가 표방한 이상적인 정치형태는 국왕과 귀족, 그리고 의회가 함께 하는 헌정적 혼합 군주정(mixed constitutional monarchy)이었다. 아가일 후작은 스코틀랜드 귀족이 중재자로서 국왕과 백성을 연결하는 한편, 국왕의 감시자로서 국왕이 지닌 왕권을 적절히 통제할 수 있는 고유의 권한과 역할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국왕과 귀족의 공동통치라는 아가일의 사상은 스코틀랜드 귀족들의 오랜 전통이기도 했다. 또한 아가일은 국왕과 의회가 통치권을 공유해야 하며, 모든 절차는 반드시 의회를 거쳐 합법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따라, 1640년대 국왕부재기 아가일은 의회정부를 통해 헌정적으로 국정을 운영해 나갔는데 이는 공화정의 형태에 가까운 것이었다. 아가일의 태생적 입지와 고유의 신념은 그를 국왕에 대한 무력저항의 길로 이끌었다. 국왕이 주어진 권한을 넘어선다면 국왕은 반드시 신민들에 의해 제한되고 저항 받아야 하는 것이 그의 정치적 신념이었다. 찰스 1세는 이러한 저항의 조건에 수렴하는 국왕이었고, 이에 따라 1640년 아가일은 발로크 성 비밀 회담에서 찰스에 대한 폐위를 계획하였다. 비록 국왕 폐위가 실제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당시 아가일의 폐위 시도 자체는 역사적으로 의미하는 바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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