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위논문
저자정보

신혜선 (경북대학교,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지도교수
김중락
발행연도
2016
저작권
경북대학교 논문은 저작권에 의해 보호받습니다.

이용수2

표지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이 논문의 연구 히스토리 (3)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이 연구는 17세기 스코틀랜드의 최고 권력자 아가일 후작(the Marquess of Argyll, 1607-1661)에 대한 연구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최고 귀족가문인 캠벨 친족의 후계자로 태어나 1637년 스코틀랜드 혁명을 거치며 자연스럽게 혁명정부의 최고 정치지도자로 부상하였다. 그리고 1640년대에는 마침내 권력의 정점에 서게 됨으로써 사실상 스코틀랜드의 국왕으로 군림하였다. 이후 아가일은 스코틀랜드 혁명뿐 아니라 아일랜드 반란과 잉글랜드 내전에까지도 깊이 개입하면서 영국섬 전체의 정국에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아가일의 전 생애는 온전히 장로교에 헌신된 삶이었다. 독실한 장로교도였던 그는 친 가톨릭적인 성향을 지닌 국왕 찰스 1세의 전단적인 종교정책에 대항하면서 차츰 장로교의 수호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아가일 후작의 종교적 열정은 그의 정치적 신념에도 영향을 주었다. 스코틀랜드 최고 귀족이었던 아가일은 언제나 위로는 국왕을 보좌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귀족으로서의 책무를 잊지 않았다. 찰스 1세가 귀족과 백성들을 향해 눈과 귀를 닫고 폭군의 길을 걷자 아가일은 국왕을 향해 망설임 없이 무기를 들었다. 이러한 그의 저항사상은 장로교의 저항이론에 기반 한 것이었다.
1640년대 아가일이 추진하였던 ‘종교적 제국주의’(religious imperialism)는 국왕으로부터 자국의 국교회인 장로교를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다. 1-2차 주교전쟁(the First & Second Bishop’s War, 1639-40)을 겪으며 그는 잉글랜드의 끊임없는 종교적 간섭과 위협으로부터 벗어나 장로교를 온전히 수호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잉글랜드의 국교회를 동일하게 장로교화하는 길밖에 없음을 절감하였다. 이것이 그가 종교적 제국주의를 결심한 이유였다. 잉글랜드 내전을 통해 맺어진 ‘엄숙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은 종교적 제국주의를 향한 그의 열정의 백미였다. 비록 아가일 후작의 종교적 제국주의는 실패하였지만 1640년대 그가 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하였던 제국주의적 시도 자체는 의미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목차

Ⅰ. 서론
Ⅱ. 아가일의 집권과 스코틀랜드 혁명
1. 캠벨 친족과 아가일의 집권
2. 찰스 1세의 종교정책과 아가일의 대응
3. 혁명의 발발과 아가일의 종교적 헌신
Ⅲ. 주교전쟁과 아가일의 저항사상
1. 1차 주교전쟁과 장로교 저항사상
2. 2차 주교전쟁과 국왕의 폐위시도
3. ‘컴버널트 동맹’과 폐위계획의 수정
Ⅳ. 잉글랜드 내전과 아가일의 ‘종교적 제국주의’
1. ‘종교적 제국주의’로서의 아가일의 잉글랜드 정책
2. 장기의회와 런던조약
3. 잉글랜드 내전과 ‘엄숙동맹과 언약’
4. 약정과 반 약정운동
Ⅴ. 결론
참고문헌
영문초록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