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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김창겸 (한국학중앙연구원)
저널정보
한국고대사학회 한국고대사연구 한국고대사연구 83집
발행연도
2016.9
수록면
161 - 192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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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신라 하대의 정치형태를 ‘貴族聯立’이라 말하나 그리 딱히 적합한 표현은 아니다.
國王은 모든 관직과 진골 신분을 초월한 존재였다. 다만 비정상적으로 즉위하여 王統이 바뀐 宣德王代와 文聖王代는 왕과 유력한 가계의 세력자에 의한 연합정권의 색채가 농후하였다. 그러나 비정상적인 즉위라 해도 왕통이 바뀌지 않은 憲德王 · 興德王代는 정치적으로 太子(副君)나 上大等 · 兵部令에 임명된 아우들보다 초월한 왕이면서, 친족상으로 兄弟가 함께 중요 관직을 독점함으로써 권력을 공유하는 형태의 王家에 의한 寡頭政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元聖王과 景文王은 강한 專制的 王權을 행사하여 皇帝의 위상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보아도 전체 780~889년 중 귀족연립적 성격을 보였던 것은 宣德王(780~785)과 僖康王 · 閔哀王 · 神武王 · 文聖王 재위기(836~857)로 28년 정도에 불과하고, 대부분 시기는 그렇지 않았다.
한편 元聖王과 景文王家期에 국왕이 황제적 위상을 가졌다고는 하나, 중앙 진골귀족들이 정권에서 이탈 현상으로 정부의 기능은 점점 약화되어갔다. 결국 眞聖女王代에 이르러 농민반란이 발생하여 전국이 혼란에 빠졌으며, 또 중앙 통치력이 지방에까지 미치지 못하자 지방세력이 대두하였다. 그 결과 後三國의 혼란기를 맞이하고 마침내 신라는 멸망하였다.

목차

국문초록
I. 머리말
II. 정치형태의 다양성
III. 국왕의 황제적 위상
IV.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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