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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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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정보
저널정보
한국문학회 한국문학논총 한국문학논총 제50호
발행연도
2008.1
수록면
183 - 229 (4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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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제영시는 진주 지역의 문학성을 대표하는 문학 갈래로서 인정받고 있다. 촉석루는 역사적으로 흥폐를 반복했고, 누각 존립의 실태에 따라 형상화된 시적 의미도 다양한 편폭을 지니고 있다. 이는 촉석루 시를 이해할 때 치밀한 제재 분석이 전제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제재로서의 촉석루는 누각들의 변천 과정, 누각의 배치 형태, 누각의 심미적 요소 등의 특징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기존의 연구에서도 이를 검토했지만, 결과가 불충분하거나 역사적 실체와 합치되지 않은 점이 더러 있다. 따라서 여러 문헌과 자료를 통해 본고에서 규명한 새로운 결과는 제재 접근에 있어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할 것이다. 촉석루는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쳤는데, 기존의 경우 일곱 번으로 보고 있으나 1786년과 1887년 두 차례 더 중수가 있었던 사실을 추가로 밝혔다. 이로써 18세기 이후 200여 년간의 중수 공백을 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1593년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성이 함락될 때 촉석루는 전소되지 않았고, 일부가 훼손된 것으로 보는 것이 실제에 부합함을 알았다. 촉석루는 단독 건물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서각과 동각을 부속 누각으로 거느린 웅장한 건물 구조였음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흔히 이를 간과하고 있지만, 임란 전까지만 해도 촉석루는 쌍청당과 임경헌을 서각으로, 함옥헌과 청심헌을 동각으로 거느렸다. 부속 누각은 임란 때 모두 소실되었는데, 서각은 끝내 복구되지 않았고, 동각은 곧바로 중수되었다. 이중 청심헌은 적어도 1757년 이전에 벌써 훼철되었고, 함옥헌만 유일하게 존속되다가 20세기 초에 사라졌다. 이는 촉석루 본루만 기억되는 현재의 고정 관념과는 아주 다름을 보여준다. 촉석루는 부속 누각의 존재로 승경에 대한 심미적 흥취가 더욱 배가되었다. 한편 임진왜란의 특수한 경험은 촉석루의 제재 영역을 확장하고 주제 의식을 전환시켰다. 즉 왜적에 대한 집단적 적개심, 전후 누각 중건에 따른 희열과 민족 자부심 등은 촉석루 제재에서 발견한 새로운 인식 내용이다. 특히 임진 사적을 대표하는 의암, 의암사적비, 의기사 등에 상징화된 충의 정신은 근대에도 여전히 촉석루 제영시에 적극적으로 수용되었다는 점이다. 의암사적비는 의암 위 언덕의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 하지만 이 비석은 원래 촉석루의 부속 누각인 동각 위에 건립되었는데, 옛 지도나 개인 일기를 통해서 그 실재를 최초로 입증했다. 이보다 약간 뒤에 나라로부터 사액을 받아 의암 위에 정려각을 건립했는데, 19세기 이후 어느 때에 현 위치로 비석을 이전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의외의 형태로 되었을 뿐이다. 이로써 의기 정표로서 의암사적비는 거의 동시대에 정려각과는 따로 존재했고, 애초의 위치는 지금의 장소가 아닌 촉석루 위쪽이었음이 새롭게 드러났다. 촉석루가 역사적으로 변천한 실체에서 보듯이 제재에 대한 치밀한 분석은 작품 해석과 감상의 기초적 단계로서 의의가 있는데, 본고를 통해서 충분히 다루지 못한 부분은 앞으로도 계속 논의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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