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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국서예학회 서예학연구 서예학연구 제29호
발행연도
2016.1
수록면
63 - 99 (3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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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금석학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일은 19세기에 있었던 한중금석문의 교류와 연구이다. 이 시기는 청조를 방문했던 많은 문인들과 역관에 의해 금석학자들과의 교유가 확대되었고, 이를 계기로 금석문을 연구대상으로 삼고자 하는 학풍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으로, 그 중심에 覃溪 翁方綱(1733~1818)과 秋史 金正喜(1786~1856)가 있었다. 이 두 학자의 교류는 韓中간의 금석 탁본의 교류와 서예사적 영향에 의해 추사금석학을 탄생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의 18세기 후반과 경화지역은 청대의 학문과 예술에 대해 관심이 증폭된 시기로, 추사는 1809년 10월 24세에 司馬試에 합격하여 生員이 되면서 아버지 김노경이 冬至副使로 연경에 갈때 子弟軍官의 자격으로 함께 중국에 가게 되어 40일간 머무르며 계획적이고 체계적인 공부를 하게 되었다. 이 짧은 기간동안 옹방강을 비롯한 曹江(?~?) ․ 徐松(1781-1848) · 阮元(1764~1849) ․ 朱鶴年(1760-1834) ․ 李鼎元(1749-?) ․ 李林松(?-?) 등과 만나면서 시서화는 물론 청조고증학을 받아 들이는 창구를 만들어 놓았고, 귀국후에도 이들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유지하여 새로운 학문에 대한 열망으로 추사금석학을 체계화시켰다. 특히 옹방강은 청대 최고의 학자로 조선의 젊은 청년과의 만남이 쉽지 않았으나 추사의 스승인 朴齊家(1750~1805)의 소개편지로 귀한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며, 이러한 인연으로 옹방강의 서재인 石墨書樓에서 중국의 귀중한 탁본진본과 진적을 볼 수 있었던 행운의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후 추사는 금석학과 고증학에 전념하는 큰 계기가 되어 귀국 후에도 종종 서신을 나누면서 금석문을 분석하는 방법과 고증하는 과정, 제발, 쌍구의 체제를 지도 받았다. 당시 조선은 금석학 분야의 심도 있는 연구보다는 금석문을 서법연마의 자료로 활용하거나, 탁본을 통해 완상의 대상으로 삼았던 게 전부였으나 추사가 금석학의 체계를 세운 이후부터 금석문을 학문의 대상으로 삼아 체계적인 연구를 하면서 고증과 분석을 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어 여러 학자들에 의해 많은 성과가 있었다. 따라서 탁본첩의 제작이나 금석문 목록집의 편찬에서 더 나아가 금석문의 내용에 관해 釋文을 하고, 그 역사적인 유래와 의미, 서체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독립된 학문으로서의 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따라서 목록집의 경우에도 단순히 비석의 위치나 명칭을 기록하는데서 더 나아가 건립 시기를 추정하고 간략한 해제를 첨가하는데까지 나아가게 되었으며, 題跋文, 서예작품, 쌍구작품 등의 형태로도 분석결과를 남기게 되어 한국서예사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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