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조선조 말 왕실가의 정치가이면서 당대 석학이자 서화가로 덕망이 높았던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 1853~1939)가 서사한 금석문(金石文)을 서예학·철학적 관점에서 그 예술성과 인문학적 가치를 유기적으로 규명하는 글이다. 다만, 그의 필적 금석문이 소재한 지역은 전라도·경상도로 제한한다. 석촌 필적의 금석서예는 각각의 필의에 적합하는 선현(先賢)의 필흔을 찾아 비교·분석·확인하였다. 그 결과 윤용구 필흔의 금석문은 자출기의(自出己意)하여 창신(創新)의 필획을 표출하였음을 규명하였다. 이러한 석촌 필적(筆跡)의 금석문에서 드러나는 비액(碑額) 서체의 특징은 두전(頭篆)의 서체와 전면(前面) 비액(碑額)의 서체(書體)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두전 서체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른 석비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대전(大篆)을 취하여 고박(古朴)한 맛을 살렸고, 이사·등완백·왕주·이양빙·조지겸·황사릉 등의 필의(筆意)가 엿보이는 소전(小篆)의 자형을 선택한 글씨 또한 일반적인 한 서가(書家)의 자형(字形)을 취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이 자전(字典)에 없는 서체이거나, 아니면 자전에 있는 서체라 하더라도 완전히 같은 글자라고는 볼 수 없는 서체이다. 아울러 석촌은 그 특유의 강골찬 해서(楷書) 즉, 구체(歐體)의 필의(筆意)가 있는 두액(頭額)을 썼는데, 이 해서 두액은 일반적인 비신(碑身) 글씨의 구성형태가 아님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그 당시 조선 말기의 시대에는 전서(篆書)만 두액(頭額)으로 쓰인 서체가 아니라, 해서 또한 두액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라 하겠다. 그리고 전면(前面) 비액(碑額)의 서체는 단아하면서도 강의(剛毅)한 구양순(歐陽詢) 해서를 비롯하여, 해서에 행서(行書) 기운(氣韻)을 가미(加味)한 필체(筆體)를 드러내기도 하였으며, 나아가 역동적이며 생생한 행서로서 비주(碑主)의 의기(義氣)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또한 석촌의 전면 비액의 서체에서 드러나는 특이점은 바로 비수(肥瘦)의 획이라 하겠다. 석촌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가늘고 굵은 획(劃)의 강력한 대비(對比)를 통하여, 다이내믹한 힘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점은 중국의 서예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다. 다만 조선의 경우에는 추사(秋史)의 필획에서 그 독특한 필의가 보인다. 따라서 석촌의 이러한 비수(肥瘦)가 대비되는 획들의 묘합(妙合)은 오히려 역동적이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활발발(活潑潑)한 생명성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존고(尊古)적 서예미를 함의(含意)한 예서(?書) 필적은 그의 서예에서 보기 드문 필의인데, 이 필흔은 그리 노련하고 세련된 행필로 보이지는 않지만, 그 시대에 통용되던 금석서예의 서체와 예서·해서의 그 변천적 원류를 살펴볼 수 있는 필의라 하겠다. 그리고 비음(碑陰)의 대표적 서체는 해서로서 드러났는데, 석촌은 여러 서체에 능하였으나 그의 강골찬 해서는 더욱 빼어나다. 이 해서는 구체(歐體)가 그 바탕을 이루고, 북위(北魏) 해서가 가미되어 험절(險絶)하고 금석기(金石氣)가 강하게 드러나는 서체이다. 이 가운데에서도 석촌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되는 <조경단비(肇慶壇碑)>는 금석기가 강한 해서로서, 장중하면서도 강인한 파책과 날카롭고 예리한 능각 아래, 험준하고 강건하면서도 자유로운 북위서(北魏書)의 신채(神采)가 조화를 이루어, 정서(正書)의 바른 풍격(風格)이라 할 수 있는 자신만의 해서 글씨를 표출하고 있다. 아울러 개성적이고 혼후하면서도 굳세고 웅강한 특징을 갖고 있는 안체(顔體)적 필의, 또한 석촌 특유의 세련된 서체와는 다르게 어리숙해 보이고 서툴러 보이는 해서에 예서풍을 가미한 비음의 서체는 담담하며 예스럽고 고박(古朴)한 기상(氣像)이다. 그러므로 이를 종합해본다면, 석촌 윤용구의 서예는 그야말로 주대(周代)로부터 시작하여 진한과 위진남북조를 거쳐 당(唐)과 청대(淸代) 서예를 아우르고 있다. 따라서 석촌 서예의 서체는 시대를 넘나드는 필의로서 자신만의 독특한 기운과 행필(行筆)에 대한 자기 철학적 의식으로 자기화(自己化)된 필획을 구사하였다고 하겠다. 이상 거론한 석비들을 굳이 전라도·경상도 지역을 구분하여 비교해본다면, 다른 도(道)에 비하여 전라도 지역의 전면(前面) 비액(碑額)의 서체에서 석촌 서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비수(肥瘦) 획의 필적(筆跡)이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아울러 전라도 지역의 윤용구 필사 금석문을 서체적 측면에서 조명한다면, 대전(大篆)으로서 두액(頭額)을 드러내고, 예서 글씨를 취한 전면의 비액(碑額) 글씨, 그리고 해서로서 두해(頭楷)를 구성하고, 해서인 듯 예서인 듯 써놓은 비음(碑陰)의 필흔, 아울러 형태적 측면에서도 [귀부방형 연꽃삼단 이수형] 등의 특이한 양식을 선보이는 등, 타도(他道)보다 전라도 지역의 석비(石碑)가 다양한 서체와 독특한 형태를 드러내고 있다. 특히 전북의 임실지역에서는 석촌이 서사한 금석문이 7기의 다양한 형태로서 가장 많이 확인되었다. 석촌은 이렇게 표출된 다양한 창신의 서체를 통하여 비주(碑主)의 스토리를 드러내었다. 따라서 석촌의 서예는 그의 맑고 강의(剛毅)한 의기(意氣)를 근간(根幹)으로 하여, 생동(生動)하는 정감(情感)을 드러내는 글씨라 할 수 있다. 나아가 그 생동의 정감을 드러내는 서체에는 정리수기(精理秀氣)적 생생(生生)의 역동적 의취(意趣)와 풍골(風骨)이 청거(淸擧)한 심미의취(審美意趣)가 함의되어있음을 규명하였다. 즉, 비액의 글씨에서 드러나는 심미의취는 문과 질이 빈빈(彬彬)한 정리수기(情理秀氣)를 바탕으로 하여, 통(通)과 변(變)을 통한 활발발(活潑潑)하고 변화무궁한 필획을 자출기의(自出己意)하여 자신만의 색깔로서 묘합하고, 역동적이며 유기체적인 생생지미의 의기(意氣)로서 표출·체현하였다. 또한 석촌의 비음(碑陰)의 서예에서 드러나는 심미의취는 강의(剛毅)한 의기(意氣)룰 단정하면서도 엄숙한 근골로 드러내었다. 이러한 일창삼탄(一唱三歎)의 완곡하면서도 여운이 있는 그만의 서예 풍골(風骨)은, 묘득천취(妙得天趣)적 심미의취가 드러난 생(生)의 경지에서, 정지(情志)의 의취(意趣)에 생명의 기세(氣勢)가 묘합을 이룬, 맑고 깨끗하며 빼어난 서예라 하겠다. 이는 석촌의 강의한 정신이 그의 금석문에 그대로 투영된 정신문화의 표석이라 하겠다. 따라서 이 정신문화의 표석인 석촌의 금석문은 다양한 서체 즉, 해서를 비롯한 전·예·해·행서의 서체와 심미의취(審美意趣)가 하나의 예술성 있는 석비(石碑)로 완성되어, 그 예술적 가치를 드러내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석촌의 예술적 가치가 있는 금석문은 당대(當代)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역사·문화적 가치 또한 크다 하겠다. 그러므로 예술·역사·문화적 가치가, 완성된 하나의 석비로서 어우러진 석촌 윤용구의 금석문은, 그 문화 예술적 심미(審美)와 가치가 창경발속(蒼勁拔俗)한 금석문으로서 하등의 손색이 없다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