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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대각사상연구원 대각사상 대각사상 제12호
발행연도
2009.1
수록면
9 - 65 (57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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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파주 보광사의 역사와 위상을 정립하고자 관련된 기록을 발굴 종합 분석하였다. 이에 따라 나름대로의 관련된 기록을 수집하고 새로운 기문을 되찾는 등 보광사의 역사에 대한 기초적 정리를 할 수 있었다. 보광사는 선각국사 도선의 국가비보사찰로 창건되어 고령사로 불리다가 현재의 이름인 보광사로 정착되게 되었다. 그 후 영조의 어머니의 숙빈최씨의 능침사찰이라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정조가 화성을 건설하고 용주사를 지어 효의 사찰로 삼게 된 것은 할아버지 영조의 소녕원의 능침사찰 보광사에서 체득한 것이었다. 영조뿐만 아니라 고종 등의 왕실사찰로서 면모를 지녔다. 때문에 파주 보광사는 수원 용주사에 선행하는 왕실의 효의 도량이라고 하겠다. 이미 보광사에는 조선중기 불교계의 중흥자 청허휴정의 적손인 편양언기가 주석하였고 그의 법손인 풍계명찰이 주석하면서 절을 일신하였다. 임란시 병화를 입었던 절을 풍계명찰과 같은 고승의 노력으로 영조에 의해 왕실능침사찰로서 크게 부각되어 보광사가 조선후기 산중불교시대의 중요한 사찰이었다. 또한 조선말 환공치조가 보광거사 유운 등과 더불어 정원결사운동을 전개했고 그 후 1896년부터 20년간 미타회를 전개되었고 그 무렵 근대불교계의 주역인 용성진종이 보광사 도솔암에서 수행하는 등 대각교운동의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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