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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널정보
한양대학교 동아시아문화연구소 동아시아문화연구 동아시아문화연구 제71호
발행연도
2017.1
수록면
93 - 124 (3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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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9월에 문을 연 명월관은 조선 궁중 요리와 연희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요리옥의 원조이자 조선의 맛과 풍류를 계승하고 보존한 ‘조선다움’의 표상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명월관이 내세운 것도, 당대인들이 인정한 것도, ‘조선다움’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답지 않음’이었다. 명월관이 내세운 것은 최신의 설비와 음식의 개량, 청결과 위생으로써 기왕의 ‘조선다움’을 破天荒的으로 개혁했다는 점이었다. 명월관은 ‘신문물’이었고, 명월관 안에서 펼쳐진 연회와 공연은 ‘신문화’였다. 돈만 있으면 신분고하에 관계없이 궁중에서 공연하던 기생들의 시중을 받으며 고급 요리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당대 한국인들에게는 ‘破天荒的’인 일이었다. 명월관이 조선다움의 表象 중 하나, 혹은 대표적 표상으로 부각된 것은 대략 1920년대부터였다. 그런데 이 ‘조선다움’은 料理보다는 총독부 권력이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조선의 이미지와 等値했던 妓生과 관련되어 있었다. 일제 강점기 명월관 요리가 ‘조선 전통 궁중 요리’인지는 중요하지 않았고, 대중도 그를 굳이 알려 들지 않았다. 그러나 기생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음식은 조선식과 일본식을 섞을 수 있었으나, 기생의 몸을 藝者의 몸과 섞을 수는 없었다. 명월관의 ‘조선다움’은 기생의 연주, 노래, 춤, 웃음과 결부되어 공고한 지위를 획득했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기생도 ‘기생다움’ 즉 ‘조선다움’에서 이탈하여 퇴폐의 상징으로 변해 갔다. 개점부터 폐점에 이르기까지 반세기 동안, 명월관이 기호로서 표상하는 것들은 ‘신식과 개량’에서 ‘조선다움’으로, 다시 ‘퇴폐와 향락’으로 이동했다. 조선에 있던 것들을 ‘개량’하여 조선에 일찍이 없던 것들을 만들었음에도 그것이 ‘조선다움의 정수’로 인식되었고, 이 새로운 ‘조선다움’은 이윽고 ‘퇴폐 향락’과 결합되었다. 이 점에서 명월관은 한국 근대 유흥의 탄생공간일 뿐 아니라, 자체로 한국 근대가 관통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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