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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민족문화연구 제66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423 - 452 (30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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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고는 18세기 시조사의 전개 구도 속에서 완암(浣巖) 정래교(鄭來僑)의 위상을 고찰하고자 하였다. 시조사의 흐름 속에서 18세기는 중인층 전문 가창자의 출현과 그들에 의해 주도된 가집(歌集) 편찬으로 집약할 수 있는 특징적 면모를 보인 시기이다. 당시 정래교는 이른바 ‘백악시단(白岳詩壇)’의 일원으로 새로운 시 창작 이론에 공감하고, 홍세태(洪世泰)와 더불어 천기론(天機論)을 본격화하면서 여항문학의 이론적 명분을 확보해 나갔다. 이러한 결실은 홍세태의 󰡔해동유주(海東遺珠)󰡕의 편찬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특히 홍세태의 <해동유주서문>에 보이는 여항문학의 가치를 긍정하는 논리 체계는, 이정섭(李廷燮)·정래교로 이어지면서 시조를 중심으로 하는 중인층 여항 예술인 활동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해주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가 󰡔청구영언󰡕의 서발문으로 구체화되었다. 정래교는 음악에 대한 관심을 바탕으로 김천택(金天澤), 이태명(李台明), 김성기(金聖基) 등 18세기 시조사와 관련된 주요 가객 및 악사들과 교유하면서 다양한 모임과 예술 활동의 장을 마련하고 궁극적으로는 시조 작품의 창작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정래교가 창작한 시조작품의 바탕에는 18세기 여항인들의 향락적·소비적 생활 기풍이 깔려 있으며, 운치 가득한 달밤에 거문고와 퉁소 같은 가악을 동반한 음주, 그리고 여기에서 오는 고고한 흥취를 드러낸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한편 18세기에는 악조상의 변화, 즉 고조-신조의 변화 구도 속에서 정래교는 신조를 긍정하고 지지하였으며, 이러한 연장선에서 신조를 기반으로 음악활동을 이어간 김천택·김성기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결국 정래교는 18세기 시조사의 흐름 속에서 시조예술을 중심으로 하는 중인층 여항 예술인들이 활동할 수 있는 이론적 명분을 마련해주고, 직접 그들과 어울리며 여러 문예활동을 통해 시조예술의 장을 넓혔으며, 음악상의 변화 국면에서도 그 신조의 흐름에 잘 편승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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