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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도시인문학연구 도시인문학연구 제7권 제2호
발행연도
2015.1
수록면
135 - 178 (44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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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 사료와 󰡔낙양가람기󰡕, 각종 묘지명 등의 자료를 종합하면 북위(北魏) 후기 낙양(洛陽)에는 북위황실과 제실십성(帝室十姓), 훈신 8성(勳臣八姓) 등 호인(胡人) 지배층과 한인(중국인) 관료, 서역인, 고구려인, 투르크계 유목민, 아랍인, 흑인, 일반 한인(중국인) 등 다양한 종족(種族)이 공존하는 국제도시였다. 󰡔낙양가람기󰡕에 따르면 낙양의 인구는 10만 9천여 호였다. 이 가운데 서역인은 1만 가(家), 남조에서 항복한 사람은 3천 호였다. 국적으로 보면 낙양에는 최소 11.9%의 외국인이 살았고, 그 가운데 서역인이 9.1%를 차지하였다. 당시 북위의 지배층이었던 호인(북방 유목민과 그 후손)은 효문제의 낙양천도 이후 옛 수도 평성(平城)에서 새 수도 낙양으로 대거 이주하였다. 하남낙양인(河南洛陽人)으로 본적을 바꾸고 낙양성의 방리(坊里)에 거주했으며 사후 북망산(北邙山)에 매장된 호인이 낙양 거주 인구 가운데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문화적, 혈연적 배경이 다른 다양한 인종이 사는 낙양에서는 중국 전통의 중국 문화와 선비인 등이 중심이 된 초원 유목민의 문화, 서역 문화 등이 공존하는 샐러드 보울(salad bowl)이었다. 본문의 2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낙양에는 유가의 의례건축과 불교 사원이 함께 있었으며, 각 종족(種族)의 음식문화와 음악, 놀이문화가 공존하였다. 낙양성 남쪽에 위치한 사통시(四通市)는 낙양에 사는 각 종족의 만남과 경제교류의 장소였다. 사통시는 국제도시 낙양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다. 이 시장을 통해 서역의 상품이 낙양에서 거래되었고, 북위의 호인지배층은 서역산 제품을 애용하였다. 북위후기 낙양은 당대 장안에 앞서 중국에 나타난 국제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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