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 내서재 .. 알림
소속 기관/학교 인증
인증하면 논문, 학술자료 등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어요.
한국대학교, 누리자동차, 시립도서관 등 나의 기관을 확인해보세요
(국내 대학 90% 이상 구독 중)
로그인 회원가입 고객센터 ENG
주제분류

추천
검색

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저널정보
동양철학연구회 동양철학연구 동양철학연구 제61호
발행연도
2010.1
수록면
363 - 394 (32page)

이용수

표지
📌
연구주제
📖
연구배경
🔬
연구방법
🏆
연구결과
AI에게 요청하기
추천
검색

초록· 키워드

오류제보하기
欽齋 崔秉心(1874~1957)은 간재학파의 호남 문인을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최근 전주의 최근 전주의 ‘한옥마을 三齋’라고 해서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인물이다. 본 글에서는 이 금재의 생애와 학문, 그리고 시대에 대한 그의 생각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금재라는 호는 금재 스스로 ‘흠’자의 옛날 음인 ‘금’으로 불러 자부심의 표상으로 삼았던 것인데,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도 ‘흠재’가 아닌 ‘금재’라고 불렀고, 본 논문에서도 ‘금재’라고 부른다. 최병심(字;敬存)은 1874년(고종 11년) 10월 5일 전주 校洞(현 한옥마을 일원)에서 아버지 碧溪 崔宇洪과 어머니 利川 徐氏의 5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으며, 여기서 1957년 향년 84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냈으며, 유학자로서의 높은 명성 때문에 전주에서는 ‘전주 최학사’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금재는 자신의 학문적 다짐을 艮齋 田愚(1841~1922)를 사사하면서 더욱 다지게 되는데, 간재의 성리설은 性師心弟說로 요약 정리될 수 있다. 성사심제의 명제는 그가 종지로 삼았던 心本性⋅性體心用 등의 명제를 더욱 실질적인 의미로 제기한 것이다. 淵齋 宋秉璿 문하인 趙章燮은 간재의 ‘성사심제’에 대해 「性師心弟辨」을 지어 간재의 이론을 조목별로 변박하였는데, 이에 대해 간재가 직접 「性師心弟辨辨」을 지어 조장섭의 비판을 조목조목 재반박하였고, 금재 역시 「性師心弟辨辨」과 「性師心弟再辨二」를 지어 조장섭을 조목별로 비판하고 있다. 금재의 이 두 글에서는 간재의 ‘성사심제설’에 대한 이해 깊이가 어떤지를 여실히 볼 수 있으며, 그가 어떻게 간재학을 충실히 계승하고 있는지를 살필 수 있다. 간재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받은 금재 역시 열강제국의 침략에 따른 국난 속에서 자신의 거취를 은둔 강학의 행로로 정하고 간재와 같은 길을 걸었다. 금재는 국가가 무너진다면 도를 지켜 훗날을 기약해야 하고 도가 지켜진다면 국가도 회복할 수 있다는 신념 아래 강학하고 교육하면서 의리를 지키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금재는 전주에 옥류정사를 개설하고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여 명성을 얻었다. 금재의 기록을 보면 간재의 문인들 가운데 성리설뿐만 아니라 항일기록이 두드러지고 있다. 금재의 항일의식은 임자동밀맹단, 한전 사건, 염재야록 서문 사건 등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이 때문에 간재의 문하에서뿐만 아니라 호남지역을 대표하는 유학자로서 추앙받을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그의 항일사상은 마침내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아 독립운동가로 기록되고 국가유공자로 포상되었다. 정부는 1990년 8월 15일 금재의 공로를 기려 그에게‘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던 것이다.

목차

등록된 정보가 없습니다.

참고문헌 (11)

참고문헌 신청

함께 읽어보면 좋을 논문

논문 유사도에 따라 DBpia 가 추천하는 논문입니다. 함께 보면 좋을 연관 논문을 확인해보세요!

이 논문의 저자 정보

최근 본 자료

전체보기

댓글(0)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