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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기본 정보

자료유형
학술저널
저자정보
임영달 (호남문화재연구원)
저널정보
한국중세고고학회 한국중세고고학 한국중세고고학 제5호
발행연도
2019.6
수록면
203 - 224 (22p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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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읍성은 고창군의 서부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무장현의 치소로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에 위치하고 있다. 무장현은 1417년 새로 설치된 현이며, 읍성도 이때 새롭게 축조되어 조선시대 읍성 중에서도 축조에 대한 확실한 연혁을 가지고 있어 학술적·역사적 가치가 크다.
무장읍성에 대한 조사는 2005년 호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시작되어 8차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진 상태인데, 2018년 읍성 내부의 동쪽지역 조사과정에서 수혈 내부와 그 주변 퇴적토에서 조선시대 화약부기인 비격진천외가 11점이 출토되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이 글은 무장읍성 내에서 출토된 비격진천뢰가 도입되었을 시점에 대해 문헌자료 검토를 통해 추정해 보고자 하였다.
비격진천뢰를 제작하기 시작한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관련된 문헌기록과 실물자료를 통해 볼 때, 임진왜란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생각되며, 시험과정을 거쳐 본격적인 사용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직후부터로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 무장현은 주요한 전장은 아니었으며, 당시의 전투와 관련된 일련의 기록으로 볼 때, 전방지역으로 군사 및 무기를 보급하는 군현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 비격진천뢰가 무장현에 도입되어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거기에 더하여 무장읍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 정유재란 당시 화재로 전소된 기록과 읍성의 발굴조사 자료로 볼 때, 정유재란 중 읍성 내부가 피해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어서 당시 비격진천뢰가 도입되었다 하더라도 전란 중 폭발하여 없어 졌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임진왜란 이후 병자호란까지 조선의 군사력은 북방지역을 중심으로 강화하고, 전라도의 군사 및 군기를 이 지역으로 이동시키기 까지 하였기 때문에, 이때에도 무장현에 비격진천뢰가 도입되었을 가능성은 낮다. 그리고 문헌자료로 볼 때 19세기 이전까지 비격진천뢰에 대한 군사적인 관심은 임진왜란 시기보다 적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때문에 무장읍성에 비격진천뢰가 도입된 시점은 19세기 이후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 점에서 1872년에 ‘무장현에 화포군을 배치하였다.’라는 기록이 주목되는데, 당시는 이양선의 출몰과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의 사건이 일어난 시점이어서 서해와 인접한 이 지역에 정예 병력을 배치하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이때 당시까지도 전략무기 중 하나였던 비격진천뢰를 무장현에 가져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목차

국문초록
Ⅰ. 머리말
Ⅱ. 비격진천뢰의 제작 시기에 대한 검토
Ⅲ. 임진왜란 시기 무장현 내 비격진천뢰 도입 가능성 검토
Ⅳ. 임진왜란 이후의 상황과 격진천뢰 도입 시점 추정
Ⅴ. 맺음말
참고문헌
Abstract

참고문헌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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